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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인공지능(AI) 확산이 사모투자(PE) 시장의 자금 흐름을 바꾸고 있다. 단순히 AI 관련 자산으로 자금이 몰리는 흐름을 넘어, 기존 핵심 투자처였던 소프트웨어(SaaS)에서 산업재·인프라 등 실물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HALO(Heavy asset, Low obsolescence)' 트레이드로 부른다. 자본 투입 규모는 크지만 기술 변화로 빠르게 가치가 훼손될 가능성은 낮은 자산을 뜻하는 개념으로, 최근 글로벌 투자시장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HALO는 말 그대로 '무거운 자산이지만 오래 쓰는 자산'이다. 산업재, 에너지, 전력망, 데이터센터, 광물 등 물리적 기반을 갖춘 자산군이 대표적이다. 이들 자산은 성장성 측면에서는 소프트웨어 대비 제한적일 수 있지만, 기술 변화에 따른 대체 위험이 낮고 장기적인 수요가 비교적 명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주요 외신 등에 따르면 최근 시장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오히려 프리미엄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흐름의 출발점은 역설적으로 AI다. 생성형 AI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제공하던 기능 상당 부분이 대체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기업의 장기 성장률과 엑시트 밸류에이션을 기존 방식대로 가정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기 사이클이나 금리 문제가 아니라, 사업 모델 자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외신 등에 따르면 블랙스톤, 베인캐피탈, 브룩필드 등 글로벌 대형 PE들은 최근 소프트웨어 투자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검토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 시장에서는 산업 기반 자산을 둘러싼 대형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폭스바겐이 중대형 디젤엔진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는 가운데 복수의 PE가 인수를 검토 중이며, 영국 항공우주 부품사 시니어(Senior)를 두고도 재무적 투자자 간 경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TK엘리베이터 매각 역시 약 250억유로 수준의 기업가치를 전제로 논의가 진행되며, 인프라·산업재 자산으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
반면 소프트웨어 투자 시장은 둔화 흐름이 뚜렷하다. 기업 매각과 IPO가 지연되거나 보류되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엑시트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고, 보유자산 평가 부담도 확대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소프트웨어 투자 비중을 크게 늘려온 PE들의 경우 포트폴리오 전반의 재평가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영향이 에쿼티 투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을 기반으로 한 레버리지바이아웃(LBO) 구조가 흔들리면서 크레딧 시장까지 부담이 확산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업 대출은 높은 레버리지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아, 밸류에이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투자자들의 리스크 회피 성향이 빠르게 강화되는 양상인 까닭이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판단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이번 흐름은 단순한 섹터 이동이라기보다, '무엇에 프리미엄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준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는 고성장 스토리보다 '실체가 있는 자산'과 '확실한 수요 기반'을 더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에는 자산이 가볍고 확장성이 높은 소프트웨어 모델이 높은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했다면, 현재는 AI로 인해 이러한 '무형 자산'의 희소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반대로 광물, 전력망, 에너지, 산업설비처럼 AI가 대체할 수 없고 오히려 필수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영역은 구조적 수요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투자 매력이 부각되고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이전에는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에 돈을 지불했다면, 지금은 그 기대가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지부터 따지는 단계로 넘어왔다"라며 "AI 시대에는 기술 그 자체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 기반의 가치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감지된다. AI 투자 확대 흐름 속에서도 자금은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보다 데이터센터, 전력, 반도체 설비 등 인프라 영역으로 먼저 유입되는 모습이다. 금융지주와 기관투자가들도 신재생에너지, 데이터센터 등 안정적인 현금흐름 기반 자산에 대한 검토를 확대하고 있으며, 일부 대형 딜에서는 글로벌 PEF와 국내 자본이 함께 참여하는 구조도 늘고 있다.
다만 소프트웨어 투자가 구조적으로 위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계에서는 향후 AI 대응 능력에 따라 기업 간 밸류에이션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선별 국면’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일부 소프트웨어 딜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AI를 내재화한 기업에는 자금이 집중되는 흐름도 나타난다.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소프트웨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일괄적으로 프리미엄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시장이 바뀌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