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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블록체인 기술이 채권 발행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 여러 나라 통화를 동시에 조달하는 '국경 없는 자본조달'이 가능해졌다. 서류와 중개기관을 거쳐 길게는 5영업일이 걸리던 외화채권 발행과 결제 과정이 스마트계약 하나로 단축된다. 국내 기업들도 본격적인 발행을 시작했지만, 국내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지난 23일 7억8000만홍콩달러(한화 약 1475억원) 규모의 디지털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국내 비금융기업 최초다. 앞서 지난 1월 미래에셋증권이 3억2500만홍콩달러와 3000만달러(약 1058억원)를 동시에 조달하며 국내 금융사 최초 디지털 채권 발행사 타이틀을 달았다.
두 건 모두 사모 방식으로 HSBC가 주관을 맡았다. 발행에서는 HSBC의 블록체인 기반 토큰화 플랫폼 오라이언(Orion)이 활용됐다. 홍콩 금융관리국(HKMA)의 공식 채권 결제 인프라 CMU와 연동된 이 플랫폼은 홍콩 정부가 디지털 그린본드 발행에 쓴 기술 인프라와 동일하다.
디지털 채권은 발행, 등록, 거래, 결제 등 전 과정을 블록체인 기술로 처리해 글로벌 투자자 접근성이 유연하다. 가장 큰 장점은 속도와 비용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이번 발행으로 기존 외화채권의 결제 기간을 5영업일에서 3영업일로 줄였다. 홍콩 금융당국이 디지털 채권 활성화를 위해 운영하는 발행 비용 보조금 제도도 활용해 조달 금리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
HKMA에 따르면 디지털 채권은 전통 방식 대비 발행 총비용을 평균 약 1%포인트(p)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글로벌 트레이딩, 에너지 사업을 주력으로 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외화 조달이 중요하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 일반 기업들의 디지털 채권 발행도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해외 매출 비중이 높거나 외화 자금 조달 수요가 큰 기업들이 다음 주자로 거론된다. 금융사인 미래에셋증권과 비금융사인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차례로 디지털 채권 발행 포문을 열면서 업종을 가리지 않고 디지털 채권 발행 검토가 가능할 것이란 설명이다.
글로벌 성장세도 빠르다. 유럽금융시장협회(AFME)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분산원장기술(DLT) 기반 채권 발행 규모는 약 30억유로(약 5조2000억원)로 집계됐다. 2025년엔 100억유로(약 17조3000억원), 2026년엔 350억~400억유로(약 60조5900억~69조2400억원) 수준으로 성장을 전망했다.
글로벌에서는 홍콩이 가장 시장 선점에 적극적이다. 홍콩정부는 2023년, 2024년에 이어 지난해 11월 세차례에 걸쳐 국채를 디지털 녹색채권으로 발행했다. 세번째 발행 규모는 100억 홍콩달러(약 1조8900억원) 규모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국내 시장은 아직 지지부진하다. 현재 국내에서는 디지털 채권을 직접 발행할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이미 발행 비용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고, 일본이 2020년 관련 법 개정을 마친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뚜렷하다.
법적 기반으로는 토큰증권(STO) 제도화를 담은 전자증권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올해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분산원장 기반으로 증권의 발행·유통 정보를 기재·관리하는 STO 발행 인프라를 전자증권법 체계 내에 도입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실제 시행은 2027년 1월부터다. 디지털 채권 발행을 위한 시행령 및 감독규정 정비, 한국예탁결제원 총량관리 시스템 구축 등 세부 인프라 마련까지 1년 이상이 더 필요하다는 평가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토큰화를 통해 기존 전통 방식에서 기간이 오래 걸리고 수작업이 많던 부분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미국도 디지털 채권에 관심이 많고, 홍콩은 이미 관련 인프라가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국내보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국내는 법적 근거와 인프라가 없기 때문에 당분간 홍콩 같은 해외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