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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이지연)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채권혼합형 상품 경쟁이 고위험 테마로 번지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담은 채권혼합형 ETF가 단기간에 1조원대 상품으로 커지자, 이번에는 코스닥150과 미국 인공지능(AI) 테마까지 같은 구조로 상장됐다.
채권을 절반 섞으면 퇴직연금 계좌에서 100% 편입 가능한 '안전자산'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상품이지만, 변동성이 큰 코스닥150까지 노후자금의 안전자산으로 볼 수 있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하나자산운용과 IBK자산운용은 지난 28일 채권혼합형 ETF를 유가증권시장에 신규 상장했다. 하나자산운용의 '1Q코스닥150채권혼합50액티브'는 코스닥150 구성종목과 단기국공채를 각각 50%씩 담는다. 코스닥150 지수를 기반으로 한 채권혼합형 ETF로는 국내 첫 상품이다. IBK자산운용의 'ITF 미국AI TOP10국채혼합50'은 미국 상장 AI 관련 종목 10개와 국고채에 절반씩 투자한다.
채권혼합형 ETF는 반도체 테마에서 먼저 흥행했다. 지난 2월26일 상장한 KB자산운용의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은 28일 기준 순자산이 1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삼성자산운용의 ‘KODEX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도 상장 2주 만에 순자산 5700억원을 기록했다. 하나자산운용의 ‘1Q K반도체TOP2채권혼합’, 키움투자자산운용의 ‘KIWOOM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까지 가세하면서 유사 상품군도 빠르게 늘고 있다.
흥행 배경에는 반도체 테마 호황과 연금계좌 규제가 함께 자리한다는 평가다. 퇴직연금은 주식형 ETF 등 위험자산 편입 비중이 70%로 제한된다. 나머지 30%는 예·적금이나 채권형 상품 등 안전자산으로 채워야 한다.
채권혼합형 ETF는 이 구간에서도 성장주 테마에 일부 노출될 수 있는 구조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예금으로 묶어두던 자금 일부를 삼성전자·SK하이닉스, 코스닥150, AI 같은 테마에 배분할 수 있다.
실제 포트폴리오 기준으로는 주식 노출도가 더 높아진다. 위험자산 70%를 주식형 ETF로 채우고, 나머지 30%를 주식 50%·채권 50% 구조의 채권혼합형 ETF로 담으면 전체 주식 비중은 최대 85%까지 올라간다. 제도상 안전자산 규정은 지키지만, 실질적으로는 위험자산 한도를 우회하는 효과가 생긴다.
문제는 이 논리가 코스닥150까지 적용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증시 대표 대형주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코스닥150은 바이오, 2차전지, 소프트웨어 등 성장 업종 비중이 높고 지수 변동성도 크다는 지적이다. 코스닥지수는 최근 52주 저점 710선에서 1200선까지 급등락했다. 코스닥150 역시 코스닥 대표 종목을 담는 지수인 만큼 시장 변동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운용업계에서는 규정상 문제는 없다는 반응이다. 대표지수형에 채권을 혼합한 구조이고, 주식 비중도 50% 수준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코스닥150 채권혼합형 ETF와 관련해 "대표지수형은 퇴직연금 100% 투자가 가능하고, 채권 기준도 혼합돼 있어 안전자산으로 판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국의 별도 문제 제기도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 정부와 거래소의 국내 증시 활성화 기조도 상품 출시를 뒷받침하는 배경으로 거론된다. 운용업계에서는 코스닥과 반도체, AI 등 이른바 '국장 테마'를 활용한 상품에 대한 시장 수요와 정책적 분위기가 맞물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법적 요건을 충족한 데다 국내 주식시장으로 연금 자금 유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장 과정에서 뚜렷한 제동이 걸리기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다만 제도 취지와의 괴리는 남는다는 지적이다. 퇴직연금 안전자산 30% 규제는 노후자금의 과도한 위험 노출을 막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성장주 지수를 절반 편입한 상품이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면, 규제가 위험을 통제하기보다 상품 설계를 통해 우회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평이 나온다.
주식 편입 비중만 낮추면 변동성이 큰 지수도 안전자산 구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준의 실효성 논란도 불가피하다. 게다가 상승장에서는 순수 주식형 ETF보다 수익률이 낮을 수 있고, 하락장에서는 코스닥150이나 AI 테마의 변동성을 일부 떠안는다. 채권 부문 역시 금리 변동에 따라 손익이 발생할 수 있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고 원금 보장형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두 종목 집중형 상품에 이어 코스닥150 채권혼합형 ETF까지 등장한 만큼, 유사 상품이 늘어날수록 투자자 설명 의무와 연금상품 분류 기준을 둘러싼 논란도 커질 전망이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채권혼합형 ETF가 연금계좌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예금으로 묶여 있던 안전자산 구간에서도 성장주 노출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 "다만 코스닥150을 절반 담은 상품까지 안전자산으로 분류될 경우 규정상 분류와 실제 위험 사이의 괴리가 커질 수 있어,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상품 심사와 규제 기준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