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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이지연)
지방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자본시장에 다시 '표(票)가루'가 날리고 있다. 선심성 공약과 압박이라는 이 가루들은 시장의 눈을 가리고, 기업의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연초 너도나도 지방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들의 투자가 정말 실효성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질문은 무의미해 보인다.
지난 2월, 현대차그룹이 새만금에 9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도 시장은 환호보다 의구심을 먼저 드러냈다. 전동화 전환의 골든타임에 처음부터 인프라를 깔아야 하는, 척박한 새만금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과연 순수한 경영적 판단인가 하는 의문이다. 현대차그룹 안팎에서도 이 사업에 대해 "지지부진한 정도가 아니라 관심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삼성그룹의 솔라시도 투자도 말이 많다. 삼성SDS 컨소시엄이 2조5000억원 규모의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 공모에 단독 응찰했는데 전라남도 해남 솔라시도를 사업부지로 선택했다. 최근 금융권에선 솔라시도에 대한 악평이 끊이지 않는다는 후문이다. 임차인들을 찾아나서봤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곳에는 아무도 안온다"는 얘기로 귀결되고 있다. 삼성그룹도 일단 지방선거만 넘겨보자는 분위기라고 한다.
반도체가 '핫'하니 또 너도나도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려 든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00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삼성과 SK를 향해, 지역 후보들은 "우리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오죽하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한 마디했다. 지난 28일 국회 세미나에서 민주당 의원이 "전남에 에너지가 풍부한데 반도체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 회장은 "전기가 있는 곳에 가야 하는 건 맞지만, 꼭 반도체 공장이 가야 하는지는 고민"이라며 "전기를 쓰는 가장 효율적인 사업을 찾고 있다"고 에둘러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기업들의 성과급,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을 두고서도 정치권이 숟가락을 얹고 있다. 가뜩이나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며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까지 나서 노사 양측의 성숙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데 민주당의 한 의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성과급을 농어민들에게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사상 최대 실적이 FTA 체결 과정에서 농축수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막대한 부담을 감내해 온 농어민들의 희생,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절박한 인내가 축적된 결과라는 게 이유다.
이런 거대한 지방 투자 담론 뒤편에선 홈플러스 같은 한계 기업의 생사결정이 '선거 이후'로 미뤄졌다. 당초 3월4일이었던 홈플러스의 회생계획안 가결 기한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각 가시화로 일단 5월4일로 두 달 연장됐다.
업계에서는 추가 연장 가능성을 높게 봤다. 회생법에 따르면 회생기한은 최대 1년이지만, 법원은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시 최대 6개월까지 연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0일 서울회생법원 회생4부(정준영 법원장)는 내달 4일이었던 회생계획안 가결 시한을 2개월 연장하기로 하기로 했다. 2만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일자리, 거기에 입점업체 점주들, 지역 상권 붕괴까지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방선거 이전에 법원이 결론을 내기는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거다.
홈플러스 관련 MBK파트너스에 대한 징계 여부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 낙인 찍힌 사모펀드(PEF)를 향한 대대적인 점검 수사의 결론이 일찌감치 금융감독원의 의중대로 '영업정지'로 났다면 현 정부의 치적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현재로선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무리한 결론 내기가 자칫 홈플러스로 불이 붙으면 선거에 부담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MBK에 대한 제제심도 선거 이후가 될 거라고들 보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잠깐의 활황을 맛본 석유화학업계에 대한 구조조정 요구도 소강 상태로 빠질 공산이 크다. 전쟁 발발 후 석유화학 제품 급등으로 국내 석유화학사들이 1분기에 양호한 실적을 거뒀고 이에 신용등급 하향 압박에서도 한숨 돌린 분위기다. 하지만 일시적 호황으로 시간을 벌었을뿐 중장기적으로는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관련 업체들의 공장이 자리한 지자체에선 구조조정 얘기는 나올 겨를이 없다.
선거철을 앞두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노골적이고 비효율적, 비이성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여당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고 야당은 무능하다. 가뜩이나 '자본'과 '신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는 시점이라 더 걱정이다.
선거가 끝나면 표가루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경영 효율성이 거세된 기업의 부실, 정치적 압박에 무의미하게 그려진 '자본'의 자국들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예측 불가능한 관치 시장'으로 규정하고 떠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자본, 한국을 향하는 자본은 '선거 이후'라는 불확실성의 안갯속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