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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매년 5월, 여의도와 종로 일대를 메우던 붉은 머리띠와 투쟁가 소리가 올해는 사뭇 다른 주파수로 들려온다. 과거의 '춘투(春鬪)'가 거대 담론과 계급 투쟁이라는 단일한 색깔의 깃발 아래 모였다면 2026년의 노동 현장은 각자의 생존과 이익, 그리고 자존심을 내건, 마치 프리즘마냥 다채로운 색깔로 파편화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다양화는 이에 대응해야 할 기업과 자본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사(勞使)의 이분법적 또는 노사정(勞使政)이라는 삼분법적인 대결 구도를 넘어 주주와 투자자, 정부까지 더해지는 복잡다단한 공식들이 만들어질 참이다.
올해 춘투의 가장 선명한 색깔 중 하나는 '비교 우위'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내건 "영업이익의 15% 성과급"이라는 직설적인 요구 이면에는 SK하이닉스라는 확실한 비교 대상이 존재한다. 지난해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확정한 것이 기점이다. 과거에는 '우리 회사의 절대적 실적'이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라이벌사의 보상'이 더 중요해졌다.
'피어 그룹(Peer Group) 비교'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인접 계열사로도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실적이 고공행진 중인 삼성바이오 노조는 "그룹 내 위상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며 삼성전자의 투쟁 수위를 면밀히 살핀다. 누군가는 기업의 투자 여력을 갉아먹는 '집단 이기주의'라 비판하지만, MZ세대 중심의 노동자들에게 이는 '데이터에 기반한 정당한 파이 나누기'로 인식된다.
삼성의 춘투는 전체의 단결보단 각각의 분열의 낌새도 보였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의 강경 노선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이른바 노노(勞勞) 갈등이 전면에 부각됐다. 반도체를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성과급에 집중돼있는 전삼노의 총파업 움직임은 구조조정을 걱정해야 하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의 상실감만 키웠다.
이러한 갈등은 삼성그룹 전체로 확장된다. 삼성전자 노조 중심의 '초기업 노조'와 각 계열사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기존 노조들 사이의 주도권 싸움은 노동운동의 파편화를 가속화한다. "전자가 받으니 우리도 받아야 한다"는 동조화 현상과 "우리는 전자와 다르다"는 차별화 전략이 충돌하면서, 과거의 무노조 경영이 사라진 자리를 '다사다난한 노사·노노 관계'가 채우고 있다. 삼성그룹에는 대응의 복잡성을, 노동계에는 연대 의식의 약화라는 숙제를 던진다.
삼성전자 노사는 정부 중재로 사후조정에 들어갔지만 이견을 끝내 좁히지 못하면서 초유의 총파업 현실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LG유플러스, 카카오 등 여타 대기업의 성과급 요구는 이제 삼성을 넘어 재계 전반의 이슈가 될 전망이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65세 정년 연장'과 'AI 도입에 따른 고용 보장' 요구는 산업 구조 전환기에 선 노동의 본능적인 공포를 대변한다.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로의 전환과 생산 라인의 로봇화는 필연적으로 인간 노동의 소외를 부른다. 19세기 영국에서 기계를 부수던 러다이트 운동이 2026년 한국에서는 '단협 문구'를 사수하려는 법률적·정치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 노조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는 노동의 미래를 위해 적립돼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는 단순한 밥그릇 싸움을 넘어, 기술 혁신의 속도를 노동이 제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요구가 현대차의 비용 구조를 경직되게 만들어 테슬라 등 글로벌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할 것이라 경고한다. 반면 노조는 '지속 가능한 기술 혁신'을 명분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한동안 노무 관리에 무게감이 떨어졌던 현대차그룹은 최근 그룹 노무 컨트롤타워인 정책개발담당에 최준영 사장을 임명했다. 기존 부사장(실장)이 맡던 보직을 사장급(담당)으로 한 단계 높였다. 그룹 전반의 노사 리스크를 최고위급에서 다루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대기업 노조의 이러한 강력한 요구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잔치'로 비치기도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기업 노조의 실리주의 투쟁이 전체 노동권의 향상보다는 '격차의 고착화'를 부른다는 냉소적인 시각은 대기업 노조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다.
주주들 역시 이들을 '동반자'보다는 '비용의 주범'으로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화두인 2026년 자본 시장에서, 노조의 강성 요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시장의 핵심 '디스카운트 요인'이다.
가장 드라마틱한 색깔은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를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다. KAI(한국항공우주산업) 노조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경영권 참여 시도를 '경영 침탈'로 규정하며 강력한 저지선을 구축했다. 경쟁사로의 피인수가 가져올 연구개발(R&D) 역량의 하향 평준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공포는 KAI 민영화에 새 변수로 떠올랐다. '기업 독립성 수호의 선봉장'이 된듯한 노조의 움직임은 기업의 M&A와 거버넌스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건이다.
유통가에서는 홈플러스가 화두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는 새 주인을 찾았지만 본체인 홈플러스는 매대에 물건을 채우지 못하는 등 회사의 존속 여부가 불투명하다. '내 일터가 자산 매각으로 공중분해 될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은 노조를 거리로 불러냈다. 홈플러스 노조는 "직원 월급을 포기해서라도 영업 정상화를 이루겠다"며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그룹의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자의 임금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각 대금, DIP(긴급운영자금) 등 모든 가용 재원이 영업 정상화에 집중돼야 한다고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은 문제다.
2026년의 춘투는 정답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이기주의로 보일 삼성전자의 성과급 투쟁이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공정의 가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경영권 간섭으로 보일 KAI 노조의 저항이 업계 종사자들에겐 특정 그룹의 독식으로부터 생태계를 수호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노동운동이 더 이상 거대 담론의 포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은 이제 파편화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실전 근육'을 갖췄다. 노사 관계는 단순히 '달래기'의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펀더멘털과 밸류에이션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리스크 매니지먼트' 그 자체가 됐다. 기업들이 이와 관련해 자문 시장에 보폭을 넓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의 봄바람이 몰고 온 이 다채로운 요구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체질을 개선하는 투명한 거버넌스의 밑거름이 될지, 아니면 갈등의 비용만 높이는 소음이 될지. 결국 각 경제 주체들이 이 '다양한 색깔'을 어떻게 조율하고 사회적 합의의 틀로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