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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미국 개인투자자들이 월가를 흔들었다. 레딧 커뮤니티와 모바일 증권앱을 통해 게임스톱 주식을 사들이며 주가를 10일 만에 최대 1640% 끌어올렸고, 대형 헤지펀드의 공매도 포지션까지 흔들었다. 이른바 '미국 개미'가 글로벌 자본시장의 주요 변수로 떠오른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이른바 '파란 눈의 동학개미'가 한국 증시의 새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리테일 1위 브로커 증권사인 인터랙티브브로커스(IBKR)가 국내 증시 외국인통합계좌 서비스를 본격 개시한다고 밝하면서다. 이에 따라 IBKR을 이용하는 해외 투자자는 별도 국내 증권사 계좌를 만들지 않고도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한국거래소 상장주식을 거래할 수 있게 됐다.
ETF 밖으로 나온 한국장…美 리테일 머니의 투자 지도가 바뀐다
기존 해외 개인투자자에게 한국 증시는 주로 ETF나 주식예탁증서(DR)를 통한 간접 투자 대상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꼽혔지만, 미국 개인투자자가 평소 쓰는 브로커리지 계좌에서 한국 원주를 직접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IBKR을 통한 거래가 열리면서 한국 주식은 해외 리테일 투자자 입장에서 '국가 ETF 안의 편입 비중'이 아니라 직접 선택 가능한 개별 종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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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AI 생성 이미지(편집)
해외 투자자 커뮤니티의 반응도 이 변화를 보여준다. 해외 투자 커뮤니티에는 IBKR 계좌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을 거래할 수 있다는 방법이 자세히 공유됐고, 일부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 거래 권한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안내했다.
단순히 거래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 종목 리스트를 정리하고, 산업별 투자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해외 투자 리서치 뉴스레터 Collyer Bridge는 최근 IBKR에서 한국 주식 거래가 가능해졌다는 점을 전제로 한국 종목 숏리스트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SK스퀘어를 SK하이닉스 지분을 할인된 가격에 보유할 수 있는 지주사로 분류했다. 한국 시장에 익숙한 투자자들이 주로 쓰던 지주사 할인, 순자산가치(NAV) 할인 논리가 해외 리테일 투자자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삼성·하이닉스 넘어 SK스퀘어…지배구조 공부하는 美 개미들
SK스퀘어가 최근 SK하이닉스와 함께 강하게 움직인 점도 이런 흐름 속에서 주목받고 있다. 물론 SK스퀘어 급등을 해외 개인투자자 유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SK하이닉스의 신고가 랠리,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 확대, HBM 공급망 재평가, 기존 외국인·기관 수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SK스퀘어 주가 역시 본질적으로는 보유 중인 SK하이닉스 지분가치가 커지며 재평가된 측면이 크다.
다만 IBKR 개방 직후 해외 투자자 커뮤니티에서 SK스퀘어가 SK하이닉스 우회 투자 수단으로 언급되고, 실제 시장에서도 SK스퀘어가 반도체 랠리의 연장선에서 재평가됐다는 점은 달라진 환경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과거 해외 개인투자자가 한국 시장에 접근할 때 가장 쉬운 선택지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같은 대형주나 한국 ETF였다"며 "이제는 그 아래에 있는 지주사 구조, 지분가치, 할인율까지 투자 아이디어로 소비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국 증시의 고질적 디스카운트 요인과도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낮은 주주환원, 복잡한 지주사 체계, 순자산가치 대비 할인은 오랫동안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의 분석 대상이었다.
달라진 점은 이런 논리가 해외 리테일 투자자에게도 직접 노출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해외 개인투자자가 한국 기업을 단순히 'AI 반도체 수혜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지분구조와 할인율을 따져 투자 아이디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국내 기업의 IR과 주주환원에도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평이다. 해외 리테일 투자자들은 정보 확산 속도가 빠르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특정 투자 논리를 빠르게 공유한다. 이들이 SK스퀘어를 SK하이닉스 할인 투자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다면, 다른 지주사와 금융지주, 산업재, 방산, 전력기기 기업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재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긍정적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스톱 사태가 보여줬듯, 미국 리테일 머니는 속도가 빠르고 테마에 민감하다. 한국 시장에서도 해외 개인투자자 관심이 반도체, 지주사, 방산, 전력기기 등 일부 테마로 쏠릴 경우 단기 거래대금 확대와 함께 변동성도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증권사엔 새 수익원, 증권주엔 검증 과제…관건은 거래대금 지속성
국내 증권사 입장에서 외국인통합계좌는 새로운 브로커리지 수익원이다. 기존 외국인 영업이 글로벌 기관투자자, 패시브 자금, 헤지펀드 중심이었다면, 외국인통합계좌는 해외 개인·준전문 투자자의 주문을 국내 시장으로 연결하는 창구다. 위탁매매 수수료뿐 아니라 환전, 결제, 리서치, 대차, 프라임브로커리지 등 부가 비즈니스로 확장될 여지도 있다.
삼성증권이 IBKR과 서비스를 공식화한 뒤 후발 증권사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이제 경쟁의 초점은 단순히 통합계좌를 여는 데서 나아가, 로빈후드·위불·찰스슈왑 등 실제 주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해외 플랫폼을 누가 확보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다.
문제는 이것이 증권사 이익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다.
외국인 개인투자자 유입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초기 실적 기여도에 대해서는 아직 보수적인 시각이 많다. 한국투자증권은 외국인 개인투자자 시장이 열릴 경우 삼성증권의 연간 브로커리지 수수료를 약 5.5% 늘릴 잠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수익원인 것은 맞지만, 최근 증권주 랠리를 단독으로 정당화할 정도의 이익 변수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증권주 급등의 본질은 IBKR 자체보다 국내 증시 거래대금 폭증에 가깝다. 코스피가 빠르게 레벨업하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형주 거래대금이 급증하면서 브로커리지 수익 기대가 커졌다. 여기에 고객예탁금 증가, 신용잔고 확대, 주주환원 기대, 밸류업 정책, 해외 개인투자자 유입 가능성이 겹치며 증권업종 전반의 밸류에이션이 재평가됐다.
향후 관건은 해외 리테일의 관심이 반복 거래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일회성 매수에 그친다면 증권사 이익 기여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해외 개인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꾸준히 들여다보고, 조선·방산·전력기기·금융주·지주사 등으로 관심을 넓힌다면 국내 증시 거래대금의 구조적 증가 요인이 될 수 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번 변화의 핵심은 '미국 개미가 삼성전자 몇 주를 더 산다'에 있지 않다"라며 "한국 기업의 산업 경쟁력, 지배구조, 할인율, 주주환원, 지주사 NAV가 해외 리테일 투자자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심이 실제 거래대금과 종목 확산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국내 증권사들이 이를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