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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은 35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 최초로 하루에 1조원씩 벌어들이는 제조업 신기원에 진입했다는 얘기다. 총파업이 벌어지건 수십조원 성과급을 내주건 반도체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이상 지금 기세가 꺾일 일은 없을 거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압도적 풍요가 노사 양측 시야를 가리고 있다.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회사나 사상 최강의 파업 레버리지를 쥔 노조나 중장기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대립이 길어지며 노사 모두 정당성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14일부터 삼성전자는 반도체(DS) 부문 전 사업장에서 비상관리상황에 돌입했다고 알려졌다. 전일 새벽 성과급을 둘러싼 노사 사후조정이 최종 결렬되면서 오는 21일 예정된 총파업을 앞두고 미리 생산 조절을 계획하는 것이다.
이날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노사 타협을 간곡히 촉구한다"면서 파업시 긴급조정권 발동을 거론했으나 삼성전자 노사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정부 중앙노동위원회가 양측에 오는 16일 사후조정 회의를 재개하자고 요청했음에도 노사 모두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DS 부문 중심 최대 노조의 대표성을 문제 삼아 협상을 중단하라는 목소리도 거세진다. 결국 15일 들어 협상에서 소외된 디바이스경험(DX) 부문 소속 조합원들은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를 상대로 임금협상 체결 및 파업 금지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 절차에 돌입했다.
노사 눈가리개 된 메모리의 '미친' 이익 창출력
노사가 강대강 대립을 이어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의 천문학적인 수익에 있다. 전방 인공지능(AI) 산업은 학습, 추론을 거쳐 에이전틱 AI 시대로 돌입하며 지속적으로 연산 수요를 폭증시키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범용 D램, 낸드까지 신규 수요처가 계속 등장하는 있어 공급사들이 팹(Fab)을 증설하고 공정을 전환해 생산을 늘리려 해도 따라가기가 벅차다.
공급이 부족한 만큼 메모리 구매 행렬은 기꺼이 웃돈을 지불하고, 삼성전자 내부엔 막대한 현금이 쌓인다. 지금 노사는 이 초과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는 것이다. 노조는 이참에 기존 상한선을 폐지하고 이익의 일정 지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지만, 회사는 이를 섣불리 명문화하기 부담스럽다.
메모리 이익 창출력은 고스란히 노조의 파업 레버리지로 작용한다. 노조는 18일간 예정된 총파업에 들어갈 경우 30조원 이상의 매출 타격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달여가 채 안 되는 파업으로 이만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기업도 산업도 없다. 파업권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힘겨루기에서 밀려날 이유가 제한적이다.
회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업계에선 당초 40조원 안팎에 달하는 성과급 충당금이나 파업에 따른 생산차질로 올해 연간 실적이 휘청일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공급이 더 빡빡해질 조짐이 보이자 메모리 가격이 이보다 더 빠르게 치솟고 있다. 생산을 줄이는 게 이익을 더 키울 수도 있는 비정상적 업황이라 마찬가지로 기존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관전평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파업 전야에도 신규 수요가 계속 발굴되면서 메모리 가격 상승이 모든 악재를 상쇄해버리고 있어서 실적 추정을 내리기도 애매한 상황"이라며 "이번 사이클에서 삼성전자가 점하고 있는 인프라 공급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외부에서 노사 협상을 압박할 수단이 많지 않아 보인다"라고 전했다.
고객사나 협력사 입장에선 달갑기 어려운 상황
초과이익 재분배를 둘러싼 노사 합의가 무척 중요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전방 고객사나 후방 협력사 등 이해관계자들이 대립이 길어지는 상황을 마냥 기다려주긴 어렵다.
실제로 현재 엔비디아 등 대형 고객사 사이에서 파업을 전후해 생산된 반도체 공급을 재고하는 기류가 전해진다. 파업 기간 라인 투입 인력이 부족해질 경우 품질 문제가 불거질 수 있고, 산업 특성상 평시 수준을 회복하기까지 재가동에도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당장에는 삼성전자에 그리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있다. HBM4 이후로 고부가가치 제품군에서 삼성전자 외 마땅한 대안이 부재한 상황이기도 하고, 공급부족이 극심한 시기 삼성전자 이상의 생산능력(Capacity)을 갖춘 경쟁사도 없다. 단기적으로는 전방 고객사나 후방 협력사들이 역으로 매출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제품군 전반에서 적기 공급 등 고객사 신뢰가 점점 중요해지는 시기다. 중장기적으로는 삼성전자 노사 갈등으로 인한 생산 차질 리스크를 업계 전반이 인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내부에서 일시적 인력풀 관리 문제가 불거진 것처럼 보이지만 업계 전체에서는 벤더 리스크 문제가 부각되는 상황인 셈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고객사 신뢰를 잃고 업계에서 고립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과거에도 압도적인 시장 지위가 독으로 작용했던 건데, 삼성전자 아니면 안 되는 시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단정하기 어려운 게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노사 합의 불가능한 회사 시스템 누가 믿을 수 있나
회사가 현 수준의 사이클이나 이익 창출력을 예상하지 못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성과급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나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이미 수년 전부터 내부에 축적되고 있었다. 최소한 초유의 총파업 사태는 수개월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반복되는 성과급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만한 인력풀 관리 시스템, 양측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회사 이사회를 향할 수밖에 없다.
장외 여론전이 일방적으로 노조를 악마화하고 고립시켜 적개감을 키운 게 패착이 됐다는 진단도 적지 않다. 노조원 대다수는 지난 수년 인력 이탈이 지속되던 시기 회사 경쟁력 복원, 장기 과제에 헌신한 인력들이다. 달래도 모자랄 상황에 감정의 골만 키워낸 전략적 미숙함을 두고 삼성전자 관리 능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부지기수다.
국가 경제와 직결된 사안을 놓고 '헛소리' 운운하는 노조 태도나 경솔한 발언에 대해서도 쓴소리가 이어진다. 정당한 권리 행사여도 외부 여론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대 노조에 힘을 실어준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메모리 사업부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나면 나머지 비메모리 소속들은 팽당할 것"이라는 적개감이 전해진다. 안팎에서 박탈감을 빌미 삼아 이런저런 청구서를 들이밀게 되면 노조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게 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덕을 모르지 않으나, 현재 메모리 사업부가 누리는 초과이익이 정당한 보상 외에 상당한 지대(rent)가 섞여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메모리 반도체가 글로벌 AI 산업 지형에서 핵심 인프라 지위를 점하게 된 게 삼성전자가 의도하고 계획한 전략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정한 시스템으로 인한 내부 갈등이 외부 불신으로 확산하는 국면이다. 삼성전자가 고객사 신뢰를 간신히 회복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다시 벤더 리스크 중심에 선 것이다. 내부 구성원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불투명한 거버넌스와 고객·협력사 피해를 볼모 삼아 실리를 챙기려는 극한 대치를 언제까지 지속할지, 눈살이 찌푸려진다는 반응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