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최대주주 확약서 받아와라"…더 높아진 거래소 IPO 문턱
입력 2026.05.18 07:00

상장 건수 급감했는데 심사 요구는 세분화
해외 주주 확약·주요 임원 엑시트 방지도 거론
업계, "투자자 보호 이해하나…기준 명확해야"

  • 기업공개(IPO) 시장의 병목이 중복상장 규제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증권가에 확산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의 상장 심사 기조가 예년보다 보수화됐다는 것이다. 

    정부는 유망기업의 자본시장 진입을 활성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발행사와 주관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추가 요구가 늘고 있다는 평가다. 올해 상장 건수가 급감한 데엔 거래소 심사 문턱 자체가 높아진 영향도 작지 않다는 게 IPO 실무자들의 시선이다.

    13일 증권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코스피 및 코스닥 시장 신규 상장 기업 수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 제외 9곳에 그쳤다. 2020년 이후 1분기 평균 신규 상장 기업 수가 20곳 안팎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 토막 난 수준이다. 대기업 코스피 상장이 자취를 감추며 공모 규모도 8000억원대에 그쳤다. 

    '역대급 IPO 불황'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상장 심사 권한을 가진 한국거래소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거래소를 IPO 시장의 새로운 병목으로 지목하고 있다. 단순히 심사 기간이 길어진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확약서나 장기 보호예수 조건이 제시되는 사례가 늘면서, 상장 심사 대응 자체가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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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한 성장기업의 상장 심사 과정에서는 해외 주요주주 측 확약서가 쟁점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기업은 해외 상장사를 주요주주로 두고 있는 구조다. 거래소가 상장 이후 지분 보유 의지와 투자자 보호 장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외 주주 측 확약을 요구하면서, 발행사와 주관사 모두 적지 않은 실무 부담을 안게 됐다는 설명이다.

    국내 최대주주나 재무적투자자(FI)라면 일정 부분 조율이 가능하지만, 해외 상장사를 상대로 한국 상장 심사 목적의 확약을 받아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평가다. 확약 문구 하나에도 현지 법무 검토와 내부 의사결정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래소가 요구하는 확약의 범위도 넓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순히 상장 직후 지분 매각을 제한하는 보호예수 차원을 넘어, 주요주주나 임원의 조기 엑시트 가능성, 상장 이후 성장성 유지 여부, 최대주주의 장기 보유 의지까지 따지는 흐름이라는 설명이다. 일부 딜에서는 일정한 사업 성과가 확인되기 전까지 주요주주 지분 매각을 제한하는 취지의 조건이 거론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주관사 입장에서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상장 심사는 본래 발행사의 사업성, 재무 안정성, 지배구조, 투자자 보호 장치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 절차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전에 예상하기 어려운 추가 요구가 심사 과정에서 제시되면서, 발행사와 주주 사이에서 조율해야 할 변수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대형 증권사 IPO 실무자는 "10년 넘게 IPO 업무를 하고 있지만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라며 "중복상장이 막히고 심사 난도 자체가 올라가면서 큰 것도 어렵고 작은 것도 어려운 시장이 됐다"고 말했다.

    거래소의 심사 기조를 두고는 핵심 산업 육성과 투자자 보호라는 두 가지 시각이 엇갈린다. 정부는 AI 등 미래 성장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거래소는 이른바 'AI 워싱'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모든 기업이 AI를 표방하는 상황에서 실제 기술력과 고객 기반, 매출 지속성 등을 따져보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거래소도 심사 기조가 일방적으로 강화됐다는 시각에는 선을 긋고 있다. 거래소 측은 "심사 난도를 더 높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투자자 보호 관점에서 상장할 만한 기업인지 디테일하게 보는 과정"이라는 입장이다.

    거래소의 이런 입장에는 과거 이른바 '파두 사태'처럼 상장 이후 주가 급락, 주요주주 매도, 실적 미달 사례가 반복된 데 따른 부담도 깔려 있다. 기술특례 상장사와 성장기업 IPO를 둘러싼 투자자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심사기관으로서 사전 검증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책 방향과 현장의 체감 사이의 괴리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주식시장 활성화와 모험자본 공급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투자금 회수 통로인 IPO 문은 좁아지는 모양새다. 중복상장 규제는 대형 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심사 보수화는 유망 성장기업의 상장 일정을 늦춰 투자까지 미뤄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투자자 보호와 시장 신뢰 제고 측면에서 거래소 심사가 정교해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심사 기준이 명문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딜마다 추가 요구가 누적되면, 발행사와 주관사의 예측 가능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증권사 ECM 고위 관계자는 "거래소 입장에서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방향은 이해되지만 문제는 현장에서 어디까지 준비해야 하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라며 "유망기업 상장을 늘리겠다는 정책과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심사가 동시에 가려면, 발행사와 주관사가 감당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가 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