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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각국 국채와 시장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지만 일부 대기업 자금 조달 금리는 낮아지는 역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금 여력이 충분한 증권사들이 우량 대기업 거래에 경쟁적으로 참여하면서 금리를 끌어내리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15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심리적 마지노선인 '4.5%'를, 30년물 금리는 '마의 5%'를 넘겼다. 일본 30년물 국채는 처음으로 4%에 도달하는 등 주요국 국채 금리도 들썩였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유가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불과 1년 전 2.7% 수준이던 한국 국채 10년물 금리 역시 4.2%를 넘어섰다. 기준금리(2.5%)와의 격차는 레고랜드 사태 이후 가장 크게 벌어졌다. 기업 조달 환경에도 먹구름이 드리운 형국인데, 일부 대기업 관련 거래는 상반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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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효성화학은 20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회사는 증권사가 설립하는 특수목적회사(SPC)를 대상으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고, 모회사 ㈜효성이 SPC 투자금에 대해 자금보충 약정을 제공하기로 했다.
신종자본증권 발행 금리는 5%중후반대로 거론된다. 작년 효성화학이 효성비나케미칼 지분을 담보로 주가수익스왑(PRS) 거래를 진행할 때보다 1%p가량 낮아질 것으로 점쳐진다. 석유화학 업황 부진과 시장 금리 상승세를 감안하면 발행사에 상당히 우호적인 조건으로 평가된다.
LS오토모티브테크놀로지스 인수금융 관련 거래도 비슷한 상황이다. LS그룹은 2017년 LS오토모티브를 KKR에 매각하며 공동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LS오토모티브 관련 차입금은 올해 8월이 만기인데 일부는 상환하고 나머지는 상환 후 새로 차입을 일으키는 안이 거론되고 있다.
LS오토모티브의 실적이 들쑥날쑥한 상황이다 보니 신규 대출 시 금리를 높여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신규 차입 금리는 기존 7%대보다 낮아질 전망이다. 이전에는 LS그룹 측 자금 보충 약정이 있었는데, 신규 거래에선 그 조건도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베인캐피탈은 보유하고 있던 고려아연 지분을 메리츠증권이 설립한 SPC에 매각했다. SPC가 조달한 자금의 금리는 연 5.7~6.0%로 기존 베인캐피탈이 보장받던 수익률의 절반 수준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경영권 유지에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하락 폭이 상당했다.
이런 거래들이 시장이나 개별 민평 대비 낮은 금리로 진행된 배경으론 증권사들의 영업 경쟁이 거론되고 있다.
발행어음과 IMA(종합투자계좌)가 잇따라 도입되면서 증권사들의 기업금융 여력은 늘었다. 그러나 증시 호조 속에 우량 기업들이 증시 밖에서 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는 감소했다. 여기에 생산적금융 실적 압박까지 받다 보니 '대기업 간판'이 달린 거래엔 증권사들의 영업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사실 앞서의 효성화학이나 LS오토모티브 거래는 '과거 기준'으로는 좋은 거래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대기업 집단 소속이고, 구조화를 통해 위험 부담도 낮출 수 있으니 증권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각 그룹에 증시 대장주인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순항하는 계열사가 있다는 점도 증권사가 주목하는 요인으로 풀이된다.
한 증권사 임원은 "시장 금리와 민평 금리는 오르는데 대기업 구조화 거래의 금리는 내려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증권사들의 기업금융 실적 경쟁이 심화하다 보니 실적이 부진한 대기업 계열사도 수혜를 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대기업의 구조화 거래 외에 일반 대출이나 사채 발행 등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이 지원을 검토해 온 삼성전자 평택 5공장 건설 자금의 금리는 3% 초중반이 될 것으로 거론된다. 은행들의 조달 금리를 감안하면 사실상 역마진이란 평가다. 삼성전자가 대출을 일으킬 필요성은 크지 않은 반면, 은행들은 상징성 있는 대기업 거래로 생산적금융 실적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일부 계열사들은 최근 시장 조달 금리가 3%대까지 떨어졌다. 비슷한 신용등급의 기업들보다 많게는 3%p 가까운 금리 인하 효과를 받고 있다. 원자력발전, 전력망 투자 확대 등 기대감이 반영된 영향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