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진심', 미국에선 '방어막'?…금융권 흔든 '美 SEC 공시'
입력 2026.05.22 07:00

美 SEC 공시에 담긴 '포용금융 리스크'…은행권 속내?
"미국선 다 적는다"…소송 공포가 만든 SEC 공시 문화
단순 해프닝인가, 실제 부담인가…건전성 우려 해석 분분
당국 "희생 강요 아냐"…핵심은 CSS 고도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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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주요 금융지주들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에 '포용금융·생산적금융'을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명시한 것을 두고 금융권의 해석이 분분하다.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공시 제도 차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강한 압박 속에서 금융지주들이 느낀 실질적인 건전성 우려가 수면 위로 드러난 '솔직한 고백'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논란이 된 문서는 KB·신한·우리금융지주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제출한 '2025회계연도 연차보고서(Form 20-F)'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취약계층 대출 장려 정책이 은행의 연체율 상승과 자산건전성 악화,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적시했다. 국내에서는 정부 정책에 적극 동조하던 금융사들이 해외 투자자들 앞에서는 '딴소리'를 했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논란이 되자 금융지주들은 자료를 통해 "미국 공시 제도의 특성상 매년 반복해 온 일반적인 기재"라며 일제히 선을 그었다. 실제로 미국 증시는 철저하게 투자자 보호와 소송 방어 중심으로 작동한다. 주관사와 회계법인은 향후 발생할지 모를 집단소송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업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재'를 공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보고서에 포용금융뿐만 아니라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가계대출 규제 변화 등이 무더기로 포함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 정책에 반발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기보다는, 미국식 '면책성 리스크 나열'에 가깝다는 해명이 실제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프닝을 단순한 제도적 차이로만 치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미국 SEC 공시가 요구하는 핵심 원칙은 '완전한 정보공개(Full Disclosure)'다. 발생 확률이 낮더라도 실제 기업 가치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요인이라면 단 하나도 누락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위험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숨겼다가 사후에 문제가 터지면 기업 및 공시 담당자는 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

    여기서 역설이 나온다. 금융지주들이 처벌과 소송을 피하기 위해 굳이 포용금융을 위험 요인으로 적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라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대통령과 김용범 정책실장이 '잔인한 금융'까지 언급하며 포용금융을 강하게 주문하는 상황에서, 은행가에서는 사실상 '리스크를 감수하고 중저신용자 대출을 강제로 늘리라는 뜻이냐'는 불만이 팽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는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못했던 시장의 냉혹한 리스크 평가가, 소송을 무기로 진실을 요구하는 미국 공시 체계를 만나 강제로 베일을 벗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당국 역시 이러한 시장의 우려와 단기적인 건전성 악화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메시지는 시장의 해석과 궤를 달리한다. 단순히 '돈을 잘 버니 리스크를 떠안으라'는 식의 압박이 아니라, 오히려 리스크를 정교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는 '신용평가(CSS) 능력'을 고도화하라는 주문이라는 설명이다.

    그간 국내 은행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 은행들에 비해 담보·고신용 위주의 영업 구조에 편중돼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선진국 은행들의 경우, 철저한 신용평가 체계를 바탕으로 리스크를 통제하면서도 중저신용자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창출해 낸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생산적금융이나 포용금융이 은행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선진국형 여신 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체질 개선의 과정이라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 은행들이 잘 못하고 있거나 안 하던 영역이었을 뿐, 신용평가를 통해 리스크를 잘 골라내는 능력을 갖추면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적게 가져가면서도 수익성은 더 끌어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해프닝'으로 당국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글로벌 투자자 앞에서는 건전성을 걱정해야 하는 한국 금융지주들의 복합적인 고민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동시에, 담보 중심의 손쉬운 영업에서 벗어나 '진짜 금융 리스크 관리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는 점 또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