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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 내부망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짙은 무기력증이 감돌고 있다. 삼성전자 노사 임단협 잠정합의안 때문이다. 교섭대표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이 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비반도체 직군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면서 파열음이 커졌다. 이는 표면적인 '절차적 갈등'일 뿐, 이면에는 삼성전자를 지탱해 온 다양한 분야의 핵심 인재들의 붕괴된 자부심과 박탈감이 자리하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스마트폰과 가전을 담당하는 DX 부문에선 "공고가 뜰 때마다 경쟁사에 지원하겠다", "근로 의욕을 모두 잃었다"며 이른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을 예고했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프라이드로 무장했던 '삼성맨'의 현주소다.
이들의 '현타(현실 자각 타임)'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반도체(DS) 부문이 유례없는 다운사이클을 겪으며 천문학적인 적자를 낼 때, 전사의 실적을 방어하며 캐시카우 역할을 한 것은 갤럭시와 가전으로 대표되는 DX 부문이었다. 그러나 노사 협상의 주도권은 조합원 규모가 큰 DS 중심의 전삼노가 쥐고 있다. 사내 주요 의사결정과 보상의 룰이 특정 사업부문의 입김에 의해 좌우된다는, '기여도'와 '대표성'의 극단적인 불일치는 조직 내 깊은 단층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이 갈등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점이다. 앞으로 각 부문 간의 파열음은 더욱 입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불거질 공산이 크다.
당장 잠정합의안에 대한 투표가 뜨거운 감자다. 성과급 격차에 대한 노·노(勞·勞)갈등이 지속되고 내부 혼선이 이어지면서 가결을 예상하기는 이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만약 투표가 부결될 경우 잠정합의안은 무효가 되고 파업 위기도 다시 고조될 수 있다.
연말연시로 다가온 초과이익성과급(OPI) 산정을 두고도 거센 충돌이 예상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DS 부문에 막대한 투자와 자원이 집중되는 과정에서, DX 부문에 전사적인 '허리띠 졸라매기'나 비용 절감을 요구할 경우 반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반도체 투자에 왜 우리가 희생해야 하느냐"는 DX의 불만과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는 전사적 과제"라는 DS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결국 시선은 경영진의 수습 능력으로 향한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보여준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은 낙제점에 가깝다.
과거 삼성은 강력한 톱다운(Top-down) 리더십과 '원 삼성'이라는 단일한 소속감으로 갈등을 덮어왔다. 하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보상의 공정성에 극도로 민감한 현재의 인재들에게 과거의 획일적인 노무 관리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사업 부문별로 전혀 다른 시장 환경과 수익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세밀하게 조율할 맞춤형 리더십과 독립적인 평가·보상 체계는 보이지 않는다. 노조의 요구에 끌려다니거나 원론적인 '소통'만을 강조할 뿐, 구조적인 불평등을 해소할 솔루션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핵심 인재의 이탈과 남은 자들의 무기력증은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기업의 펀더멘털을 흔든다. 특히 현재 글로벌 테크 시장의 최전선이 AI 폼팩터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DX 부문의 심리적 붕괴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다.
이제 소비자는 네모난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온디바이스 AI 너머를 기대하고 있다. 일상을 24시간 보조하는 스마트글라스와 XR(확장현실) 등 새로운 형태의 하드웨어, 즉 폼팩터 자체가 AI 생태계의 패권을 쥐는 시대가 열렸다.
현재 삼성전자의 위치는 위태롭다. 양적 출하량으로는 글로벌 1위를 수성하고 있지만 프리미엄 시장의 실속은 애플이 독식하고 있다. 차세대 격전지인 AI 스마트글라스 시장은 메타(Meta)가 압도적인 글로벌 룰 메이커로 군림하며 생태계를 선점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구글·퀄컴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AI 안경 등 차세대 기기 출시를 서두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절박함의 발로다. 반도체가 AI 시대의 '두뇌'라면, AI 폼팩터는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최전선의 '무기'다. 이 무기는 과거 방식의 하드웨어 제조 기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기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생성형 AI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고도의 R&D 역량이 필수적이다.
삼성전자가 이 흐름을 자신들에게 끌어오려면 최고급 두뇌들의 자발적이고 폭발적인 몰입이 절실하다. DS 부문에 가려진 DX 부문의 누적된 박탈감을 방치한다면, 치열한 AI 폼팩터 경쟁 속에서 삼성전자 갤럭시가 보여줄 수 있는 '혁신'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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