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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SK가 찾는 모든 조건이 전남·광주에 있다. 전남에는 삼성SDS가 주도하는 국가AI컴퓨팅센터가 들어설 예정이고 국내 최대 태양광 단지를 비롯한 재생에너지 기반도 갖췄다. 여기에 반도체 팹을 더하면 AI와 반도체가 맞물리는 완결된 생태계가 탄생하므로 일본이 아니라, 전남·광주에 투자하길 바란다"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11일 낸 입장문이다. 김 지사는 지난해부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추진해온 인사다. 지방선거 이후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호남 반도체 시대를 열 수 있게 결단을 내려달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펼치고 있다. 호남에는 양사가 찾는 물과 전기, 인재가 풍부하다는 게 주된 근거다.
정작 현업 실무자들이나 투자업계에선 근거가 빈약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처음 부상한 첨단 패키징 투자 외에 전공정 팹(Fab)까지 지어달라는 요청에 비해 공업용수부터 전력망, 인재풀까지 인프라 구축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업계 한 실무자는 "양사의 평택, 기흥, 이천 캠퍼스 등은 팔당댐이나 충주댐, 대천댐 등 국가급 기저 수자원에서 물을 끌어쓰고 있다. 그런데도 용수가 부족해서 지역사회랑 마찰을 빚는다"라며 "평야지대에 농업지구가 많은 호남권으로 가면 절대적인 저수량도 부족하고 농업용수랑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된다"라고 말했다.
용수뿐 아니라 재생에너지가 풍부하다는 주장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간헐성 높은 태양광·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팹 운영이 어려운데, 이를 보완하자고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깔려면 투자비가 천문학적으로 치솟기 때문이다. 결국 LNG 발전이나 대규모 계통 전력 확보 등 추가 대책이 불가피할 것이란 지적이 많다.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현지 사막 지역에서 건설되는 데이터센터(DC) 프로젝트만 봐도 태양광, 풍력 100% 발전 같은 건 없다. ESS 설치 비용이 워낙 비싸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때문"이라며 "그렇다고 다른 발전원과 믹스를 하자니 이것도 부족하고, 송배전망을 새로 구축하는 비용도 막대할 것. 솔라시도에서 진행되는 국가 인공지능(AI) 컴퓨팅센터도 관련 논의가 아직 한창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재 수급의 경우 현실성을 떠나서 사내 불안감이나 갈등만 증폭시킬 거란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갑작스러운 호남권 투자 논의 자체가 새로운 감정적 대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억대 성과급 수혜가 예상되는 양사 임직원들의 주된 관심사는 수도권 부동산과 자산 투자에 쏠려 있다.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나, 임직원 상당수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거·자산 계획을 세우는 상황에 신규 지방 사업장으로 이동을 희망하는 인력이 과연 있겠느냐는 현실적 진단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고위층 자녀의 반도체 부서 전배 청탁설 등 뜬소문까지 사내에 퍼지면서 조직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권층들이 자녀를 어떻게든 노른자 부서에 밀어넣으려 한다는 불신이 나도는 와중에, 정치권 압박에 떠밀려 지방 투자가 결정될 경우 겨우 잠재운 노사 리스크가 재차 점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전해진다.
결국 양사가 거둬들일 천문학적인 수익을 바라보고 너무 많은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드는 과정으로 보인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는 작년 하반기부터 지속적으로 거론된 사안이긴 하지만, 준비가 충분치 않은 단계에서 논의가 과도하게 앞서가고 있다"라며 "기관에선 당초 SK하이닉스가 일본 투자를 우선 검토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버는 돈이 늘어나는 만큼 갈수록 청구서가 노골적으로 날아들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에서 여기 저기서 청구서가 날아들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누가 그 비용을 지불하느냐'에 있다.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은 많지 않다. 시장에서도 정부의 균형 발전 의지나 취지, 명분, 필요성에 충분히 공감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반드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투자로 화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전략 산업의 효율 저하 우려에도 불구하고 꼭 반도체여야 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측이 최소한의 개연성이나 유인책이라도 제시해야 할텐데, 그런 상황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업계 안팎의 현직자들은 이번 논의에 대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면 선뜻 선택할 유인이 부족하다"라고 입을 모은다. 필수 기반을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입해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는 반응도 나온다.
더군다나 그 비용을 특정 기업의 투자 결정에 사실상 전가하는 방식이라면 곤란해지는 것은 기업과 주주들이다. 충분한 인프라와 구체적 유인책 없이 투자가 이뤄질 경우 향후 발생할 부담은 모두 기업과 주주들의 몫이 된다는 얘기다. 양사 주주의 절반은 외국인이다. 이번 논의에서 정치권이 목소리를 키우고 정치적 명분이 두드러질수록 양사는 지배구조와 주주가치 논란을 피해가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거둬들일 초과세수에 대한 활용 논의가 하반기 세제 개편안이나 국가전략펀드 투자처, 코스닥 승강제 같은 문제로까지 이리저리 확장되고 있다"라며 "국부가 불어나는 상황이라 여러 계획이 뜨고 질 수 있다지만, 기업 입장과 무관하게 결정되는 분위기를 걱정하는 시선이 많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