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은 AI 전환하는데 화학은 후방 지원만?…존재감 증명 필요한 LG화학
입력 2026.06.24 07:00

취재노트
엔비디아 패싱 우려 딛고 AI 올라탄 LG그룹
밸류체인서 후방 소재 공급 외 역할 불투명
R&D 15조 투자로 후방지원 강화 정공법 평

  • LG화학은 지난 수년간 첨단소재를 미래 성장축으로 삼아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을 추진해왔다. 구조조정이 임박한 전통 석유화학 사업을 대신해 신사업을 적극 육성해 범용 화학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야심차게 출범한 배터리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은 물론 본사 첨단소재 사업도 공급과잉을 직면하며 기존 성장 전략으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석유화학 출구전략으로 택한 배터리·소재 사업은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가 전기차 시장 둔화를 메꾸기까지 힘든 시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LG화학은 작년부터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스페셜티(특화) 소재 시장 진출에 힘을 실었다. 부가가치가 높고 전방 성장세가 뚜렷한 반도체로 방향을 틀어 대안을 찾는 작업으로 풀이됐다. 마침 반도체 시장이 초호황(슈퍼사이클)에 돌입하며 낙숫물이 쏟아지는 참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버넌스 개선을 요구하는 주주 압박과 리더십 교체, 정부 구조조정 정책과 중동 사태가 연달아 터지면서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3일 LG화학이 2035년까지 연구개발(R&D)에 15조원을 투입하고 반도체·모빌리티·로봇 소재를 미래 핵심 사업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새로운 전략이라기보다 기존 사업 재편 방향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큰 틀에서는 범용 화학 의존도를 낮추고 고부가 첨단소재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기존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갑자기 미래 청사진을 제시한 배경이 그룹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LG그룹은 현재 전사 차원에서 AI 대전환(AX)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연초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지시로 사장단을 비롯한 임직원 대상 AI 교육을 확대하는 한편 외부 자문까지 받아가며 AI 밸류체인에 올라타는 작업이 한창이다. 

    작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방한 당시 주요 협력 파트너에서 사실상 제외되며 안팎 불안감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이번 방한 때는 협력 범위를 넓히면서 엔비디아 생태계에 본격 합류하는 등 성과도 마련했다. 그룹 전반의 성장 동력을 AI에서 찾겠다는 구상이다. 

    대대적인 AI 인프라 구축과 AX 전략이 그룹사를 비롯해 글로벌 산업 지형을 뒤바꾸는 과정인데, 화학 사업의 위치가 다소 애매해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LG화학의 경우 공조와 로봇, 센서, 배터리, 디스플레이처럼 AI 시대의 전방 산업을 보유한 계열사와 달리 후방 소재 공급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많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HVAC나 로봇, 센서, 배터리나 데이터센터(DC) 인프라 구축 등은 전방 산업과 직접 연결되는데, LG화학은 AI 밸류체인 내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제한적"이라며 "정유나 액화천연가스(LNG) 등 에너지·발전 사업과 수직계열화한 경쟁사와 달리 순수 화학사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소재 공급과 같은 후방 지원 영역에 집중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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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소한의 주가 방어 목적 역시 함께 거론된다. LG화학 주가의 올해 수익률은 -12.16% 수준이다. 인접 계열사들은 지난 2개월여 동안 엔비디아 방한 일정을 전후해 AI 기대감을 잔뜩 반영하며 재평가 대열에 올랐지만, LG화학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형국이다. 회사가 작년부터 주주가치 제고 압박을 강하게 받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룹 AI 전략 속에서 LG화학의 중장기 역할이나 청사진을 시장에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구상 자체는 현실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평이다. 반도체 스페셜티 분야 자체는 원래도 단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고, 아직 구조조정 첫삽을 뜨기 전인 만큼 당장 사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R&D 투자 확대나 차세대 소재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는 등 회사가 당장 실행 가능한 영역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증권사 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원래 제조업에서 R&D는 로또로 비유되고, 화학사 입장에서는 특수 소재를 개발해도 직접 수요를 창출하기는 어렵지만, 정석적인 접근이 차라리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계열사가 엔비디아 생태계에 직접 뛰어든 이상 공정 단계에서부터 소재를 공동 개발하는 등 전략적 이점도 많다. 다만 성과가 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은 필요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