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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HBM(고대역폭메모리)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SK하이닉스의 '현금 사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회사가 성장전략 조직을 신설하고, 이곳의 핵심 동력이 될 투자은행(IB)·사모펀드(PE) 출신 전문가 채용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반도체 전쟁이 기술 경쟁을 넘어 '자본의 속도전'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다. 호황기에 거둔 천문학적인 현금을 단순히 라인 증설이라는 '설비의 덫'에 가두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SK하이닉스는 이달 초 곽노정 최고경영자(CEO) 직속 지원 조직인 코퍼레이트센터 내 성장전략부문을 새로 꾸렸다. 성장전략부문은 국내외 시장 분석과 투자 계획 수립, 차세대 기술 탐색 등을 담당할 것으로 전해졌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부문이 경기 이천 본사에 있으나 회사 측은 새 먹거리 창출에 더욱 힘을 실은 새 조직을 만들었다. 현재 10여명 규모지만 60여명에 달하는 미래전략부문 수준으로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SK하이닉스의 행보는 메모리 중심 포트폴리오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급변하는 반도체 산업의 지형 속에서 생존과 성장의 축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메모리 산업 특유의 변동성을 고려할 때 한 분야에 집중된 수익 구조는 경영진에겐 해결해야 할 중장기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에 이번 조직 개편을 두고 단순한 투자 확대를 넘어 '메모리 제조사'라는 단일 정체성에서 벗어나 '반도체 생태계의 허브'로 거듭나겠다는 미래지향적인 의지가 담겼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복잡한 보고 라인을 걷어내고 최고 경영진이 직접 투자를 진두지휘함으로써, 소재·장비·후공정 등 AI 핵심 기술을 즉각적으로 인수하는 등 '핀셋 투자'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신호를 감지한 순간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자원 투입이 가능한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극명하게 갈리는 포인트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서초'라고 불리는, 견고한 컨트롤타워 사업지원실이 M&A 등 투자를 조율한다. 그룹 전반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리스크를 철저히 관리하는 삼성 특유의 '시스템 경영'은 분명 안정적이라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AI 반도체 시장처럼 '골든타임'이 중요해지는 때에 현장에서 본사로, 최종적으로 오너경영인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는 때로 발목을 잡기도 한다.
IB·PE 등 투자업계 전문가들 입장에서도 SK하이닉스행(行)은 매력적인 커리어가 될 공산이 크다.
우선 '바이사이드(Buy-side) 플레이어'로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딜 중개에서 벗어나 수십조원을 손에 쥐고 직접 딜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생태계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간접 경험도 할 수 있게 된다. IB업계 관계자는 "파편화된 기술 기업들을 '패키징'해 인수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AI 생태계를 직접 설계하는 경험은 금융권이나 향후 경영진으로 성장할 때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고 경영진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이라는 평이다. 자신의 분석과 판단, 결정이 CEO에게 즉각 보고되고 투자 결정으로 이어지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대규모 인수합병(M&A)에는 인수 후 통합(PMI) 리스크나 재무적 부담이라는 과제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메모리 호황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다음 하강기가 오기 전 외부에서 성장의 축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SK하이닉스의 전략이 한 수 앞서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반도체 생산 '라인'을 확장하던 SK하이닉스가 이제 반도체 산업 '투자사'로 진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승부가 어떤 결과를 나을지 글로벌 테크 시장도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반도체 업계는 '누가 더 나은 칩을 찍어내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빠르게 생태계를 장악하고 미래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가'의 싸움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