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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향후 10년간 국내 인공지능(AI) 전·후방 산업에 투입될 자금 규모가 수천조원 단위로 불어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DC)와 반도체 생산벨트, 전력·용수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자금 수요가 예상되면서 투자은행(IB)업계의 수익원 역시 전통적인 인수합병(M&A)보다 초대형 산업자본의 조달과 배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이다.
정부의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이후 공개된 삼성과 SK그룹의 투자 청사진은 국내 자본시장이 마주할 자금 수요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성그룹은 평택·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비롯해 호남·충청·영남권에 이르기까지 총 26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비전을 제시했다. SK그룹 역시 AI DC와 메모리 반도체 생산벨트 구축을 위해 2100조원 이상의 투자 로드맵을 내놨다.
양사가 설정한 4000조원 이상 투자 계획 절반 가량은 반도체 팹(Fab) 증설과 서남권으로의 확장, 관련 인프라 투자에 투입될 예정이다. 나머지 절반은 AI DC와 발전·송배전 인프라,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 등 전국으로 관련 밸류체인을 확장하는 데 투입될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6월까지 두 차례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러브콜을 감안하면 AI 팩토리 구상이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국내외 IB업계를 비롯해 법률·회계법인까지 자문사들의 먹거리 지형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바이아웃 M&A를 성사시키기보다는 대기업 중심의 AI 팩토리 구상에 맞춰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전략적투자자(SI)와 재무적투자자(FI)를 연결하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작년부터 국내외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반도체 소부장 업체 투자 기회를 물어오기도 했지만, 어지간한 펀드로는 직접 밸류체인 내 기업을 인수하고 키워내기 힘든 분위기"라며 "눈치가 빠른 곳들은 대기업 AI DC 프로젝트나 발전소, 또는 시스템통합(SI) 계열사 소수지분 투자로 티켓부터 끊어두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밸류체인 내 소부장 업체를 직접 인수하더라도 지속적인 설비투자(CAPEX)와 연구개발(R&D)이 필수적이라는 점도 진입장벽으로 꼽힌다. 그간 PE들이 주로 투자했던 산업용·특수가스나 수처리 시설 등 부대설비(BOP)나 제조·소비재 기업과 비교해 요구되는 자본 규모나 경영 난도가 훨씬 높다는 것이다.
매각 의사가 있는 업체들조차 향후 성장성을 감안해 기대 몸값을 크게 높이고 있어 현실적인 가격에 거래를 성사시키기 쉽지 않다고 한다. 상반기 KKR이 삼성SDS와 울산 AI DC 프로젝트의 FI로 참여하고 SK이터닉스와 신재생에너지 합작사를 설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관련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기보다 생태계 안에 발을 들여놓고 투자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인베스트조선이 집계한 상반기 M&A 리그테이블도 이 같은 흐름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상반기 전체 거래액 40조8574억원 가운데 25% 이상이 AI 관련 투자·인프라 프로젝트 성격의 거래로 분류됐다.삼성과 SK를 필두로 대기업 그룹사들의 관련 투자 규모가 윤곽을 드러낼수록 IB업계의 무게중심 이동이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책펀드 자문담당 한 인사는 "지금 대기업들이 얘기하는 에이전틱·피지컬 AI 생태계 진출에 필요한 매물은 코스닥 규모의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코스닥 상장사들의 자본력, 기술력 한계 때문"이라며 "국내 PE들이 그런 기업을 발굴하고 키워내서 대기업에 매각, 회수하는 것도 현실성 떨어지는 시나리오고, PE나 IB들도 M&A 딜 메이킹보다는 금융 인프라 역할을 수행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라고 말했다.
바이아웃·인프라 펀드는 물론, 보수적이던 크레딧펀드나 인수금융 주선사들의 시각 역시 바뀌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충분한 담보나 보장수익률, 회수 안정성 등을 주로 따졌지만 AI 산업의 중장기 성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투자 기회를 잡기 힘들어지고 있어서다.
크레딧펀드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모회사가 풋옵션을 받아줄 수 있는지, 보장수익률은 얼마인지 등을 주로 따졌다면 이제는 산업 자체의 구조적 성장성을 더 살펴보고 있다. 결국 전방 AI 투자 수혜를 볼 수 있느냐의 문제"라며 "발전소 소수지분 유동화 거래 외에 클라우드 운영·서비스업체(MSP)의 메자닌 투자 등도 이런 관점에서 수월하게 진행된 것이라 본다"라고 전했다.
중복상장 규제가 강화하면서 소수지분 투자의 회수 불확실성이 높아졌음에도 인수금융 활용 사례가 늘어난 것 역시 함께 거론된다. 과거 같으면 경영권 확보가 어렵고 회수 경로가 불투명해 금융주선이 쉽지 않았을 거래들도, 전방의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이 중장기 현금흐름 전망을 뒷받침하면서 자금 조달이 수월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AI DC나 발전·송배전 등 구조적 성장성이 기대된다면 소수지분 거래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레버리지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전해진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연초만 해도 대기업 그룹사의 AI DC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사업 가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주선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라며 "바이아웃 거래가 줄어들기도 했고, 고금리로 차환 거래도 줄어든 만큼 소수지분 투자에 인수금융 활용이 늘어나지 않을까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