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가 서남권 제2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계획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800조원 규모 장기 투자를 약속했다. 용인과 평택 클러스터의 조기 완공을 전제로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대규모 청사진을 내놓은 셈이다.
시장에서는 양사의 증설 속도가 향후 반도체 수급에 미칠 영향과 함께 정부가 약속한 인프라 총력전의 실행 변수를 따져보고 있다. 수년 내 전력부터 용수까지 국토 전반 산업 인프라를 통째 재설계해야 할 정도의 난도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1기 클러스터 앞당기며 2기 인프라 동시 구축해야
현재 삼성과 SK그룹이 계획한 투자 총액은 4800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메모리 사업의 현금 창출력을 감안하면 두 그룹이 15년 동안 이만한 자본을 투입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투자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관심사는 공장 착공 시기다. 양사는 이미 지난 2018년부터 정부와 경기 남부권 투자를 협의해왔다. 그러나 SK하이닉스의 일반산단은 작년에야 1기 팹(Fab) 착공에 돌입했고, 삼성전자의 국가산단은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양사 산단 조성을 각각 12년, 7년 앞당기겠다고 밝힌 상태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의 경우 구체적인 단축 연한은 제시하지 않았지만, P4·P5를 포함한 기존 생산라인 증설 역시 조기 완공 대상으로 꼽힌다. 정부가 양사의 증설 속도를 끌어올려 5년 내 D램 생산능력을 두 배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순서상으로도 용인·평택 1기 클러스터가 먼저 가동돼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 제2 클러스터 투자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다.
이를 역산하면 정부는 늦어도 2033년까지 서남권 제2 클러스터 조성에 필요한 핵심 인프라를 상당 부분 갖춰야 한다. 문제는 아직 용인 일반산단조차 전력과 용수 공급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첨단 반도체 팹 1기에는 통상 1GW 이상 전력과 하루 20만톤 이상의 산업용수가 필요하다. 결국 정부 스스로 용인·평택은 물론 광주·전남까지 이어지는 전력망과 산업용수 공급체계를 동시 구축하는 과제를 설정한 셈이다.
6일 이재명 대통령은 3대 메가프로젝트의 후속 추진을 위한 민간합동 회의를 열고 "오직 속도전이 중요하다"라고 밝히며 전력·용수·토지 등 문제의 선제적 해결을 위한 행정절차 최소화를 강조했다. 행정 절차가 민간 투자 집행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면서 범정부 차원의 속도전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투자업계에서도 정부 의지를 체감한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천문학적 단위 인프라 투자, 정부 의지만으로 가능할까
이번 메가프로젝트에 관여하는 한 인사는 "지난 연말부터 장·차관급 실무진들의 세미나나 자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세수도 늘어날 예정이다 보니 분위기가 달라졌다"라며 "그러나 팹 증설 외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6000조원에 달하는 전체 청사진을 생각하면 인프라 속도전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여전히 걱정이 크다"라고 말했다.
수천조원 단위 투자를 뒷받침할 인프라 구축이 정부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3대 메가프로젝트에는 호남권 반도체 벨트 외 18.4GW 규모 AI DC 건설과 자율주행·로보틱스 등 피지컬 AI 밸류체인 구축도 포함돼 있다. 여기 필요한 산업 인프라 역시 천문학적인 규모로 추정된다.
인프라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에 20GW, AI DC에 필요한 18.4GW에 피지컬 AI 전후방 산업 수요까지 감안하면 5~7년 안에 40~50GW 이상 신규 부하를 국가 전력망에 얹겠다는 얘기가 된다"라며 "발전소 많이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계통 안정성이나 효율을 고려하면 국가 전력망 운영체계를 통째로 재설계하는 수준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난 수십년에 걸쳐 최대전력 약 100GW 규모의 전력계통을 단계적으로 키워왔다. 정부 구상대로면 앞으로 5~10년 안에 기존 최대전력의 40%를 웃도는 신규 수요를 한꺼번에 계통에 편입해야 한다. 원전과 화석연료, 태양광, 풍력 등 전국에 분산된 다양한 발전원에서 생산된 전력을 필요 지역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계통 안정성까지 유지해야 하는 만큼 전력망 운영 측면에서도 전례 없는 기술적 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에 산업용수 확보를 비롯해 부지 조성, 건설 인력 수급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예산과 공사기간의 문제를 넘어설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환경영향평가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절차를 최대한 단축해도 사업 과정 전반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1기 클러스터만 해도 지역민 반발 등 주민 수용성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실정이다.
美 마이크론도 中 CXMT도 증설전…프로젝트 성공하면 공급과잉 우려
정부가 약속한 인프라 구축 목표를 달성할 경우 더 본질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 지배력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증설 속도를 끌어올릴수록 글로벌 반도체 수급 지형이 요동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지금 증설 속도로는 공급부족을 해소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양사가 10년간 설비투자(CAPEX)를 1000조원 이상 늘려도 수요가 받쳐줄 것이라는 분석에도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라며 "그러나 3년 전 극심한 메모리 불황은 물론 현재 슈퍼사이클도 결국 전망에 실패했을 때 발생한 것이다. 양사 외 경쟁사 역시 각자 계산을 가지고 있다는 게 최대 맹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전자 수뇌부는 작년 하반기까지도 극심한 공급부족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에이전틱 AI 기반 추론 수요가 본격화하고 메모리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뒤에야 증설 계획을 구체화하면서 대응이 늦어졌다는 평이다. 3년 전에는 최악의 적자 국면에서 공급사 전반이 일제히 인위적 감산에 나서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 수요를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생산능력을 탄력적으로 조절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메모리 가격이 폭등한 덕에 마이크론이나 CXMT 등 해외 경쟁사들도 대규모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재무여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AI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증설 경쟁이 본격화하면 현재의 공급부족 사태가 예상보다 빠르게 해소될 가능성도 있다. 비싼 가격에도 메모리를 선점하려는 AI 빅테크들 역시 세계 각지에서 나오는 증설 계획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이들의 지불 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국기 인프라 재설계라는 난제를 풀어내도 또 다른 시험대가 남는 셈이다. 한국의 대규모 증설과 글로벌 공급 확대가 동시에 진행될 경우 최종 승패는 각국 정부의 의지나 실행능력보다 AI 서비스와 피지컬 AI가 실제 수요를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외국계 기관투자가는 "한국도 대만처럼 서남권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확장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정부 인프라 구상의 반만 달성해도 마중물을 대는 의미는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AI 경쟁이 글로벌 패권전쟁의 일환인 만큼 민관이 맞손을 잡아도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다. 가령 피지컬 AI로 전환이 늦어지면 업계 전체가 수년 내 수요절벽을 마주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