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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 행동주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촌극이다." (행동주의 펀드 관계자)
흥국자산운용이 SK하이닉스 이사회를 향해 보낸 공개 주주서한을 하루 만에 철회하면서 국내 자본시장의 행동주의 현실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시장의 관심은 서한 내용의 적절성보다 '왜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느냐'에 쏠린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의 뿌리 깊은 딜레마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흥국운용 주식운용본부는 지난 8일 'SK하이닉스 이사회에 보내는 서한 : 일반주주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주주서한을 SK하이닉스에 보냈다.
서한에는 ▲1100조원 규모 투자계획 발표 절차의 적절성 ▲배당성향 후퇴 등 미흡한 주주환원 정책 ▲SK하이닉스가 준비 중인 장기공급계약(LTA)과 관련한 계열사 간 이해상충 가능성 등이 담겼다. 특히 미등기임원이자 그룹 총수가 이사회 승인 이전에 대규모 투자계획을 전면에 나서 발표한 것은 '이사회 중심 경영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투자업계에서는 이 같은 문제 제기 자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 SK하이닉스는 투자 계획 발표 당시 이사회 결의일을 공란으로 공시했고, 향후 이사회 승인을 거쳐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거버넌스 기준에서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대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러나 흥국운용은 서한 공개 직후 "회사의 공식 입장이 아닌 주식운용본부장의 개인 의견"이라며 서한을 전격 철회했다. 일부 내용은 부적절했다는 해명도 덧붙였다.
한 행동주의 펀드 운용사 관계자는 "애초에 언론 공개를 전제로 한 행동이라기보다 IR 담당자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대기업과 공개적으로 각을 세우는 모양새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다만 회사 소속 본부장이 공식 발송한 서한을 '개인 의견'이라며 하루 만에 선을 그은 것은 다소 황당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흥국운용이 이처럼 서한을 철회한 배경으로 대기업과의 거래 및 영업 관계를 꼽는다. 특히 이번 투자 계획이 정부 정책과 맞물린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이 향후 운용사 비즈니스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같은 현실적 딜레마는 과거에도 반복됐다. KB자산운용은 2018년부터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한 공개 주주서한을 잇달아 발송하며 '한국형 주주관여주의'를 이끌었다. 골프존의 계열사 거래를 문제 삼아 골프아카데미 사업 인수를 무산시키는 등 실제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국내 행동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혔다. 당시에는 행동주의가 국내 자본시장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동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9년 하반기부터 KB운용의 공개 주주관여 활동은 눈에 띄게 줄었고, 이후에는 투자 기업의 회계 이슈 등 주요 현안이 불거진 상황에서도 공개적인 문제 제기나 주주서한 발송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결국 그룹 차원에서 공개 행동주의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며 "계열사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퇴직연금, IB, 여수신 등 다양한 영업을 해야 하는 구조에서 운용사만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흥국운용 사례 역시 이 같은 자본시장의 오래된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과의 충돌 자체를 투자 전략으로 삼는 일부 독립계 행동주의 펀드를 제외하면, 국내 제도권 운용사들은 대기업과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은행·증권·보험 등 대형 금융그룹 계열 운용사일수록 계열사 차원의 거래와 영업이 얽혀 있는 만큼, 대기업 앞에서는 결국 '갑을 관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을 감시해야 하는 주주이면서도 동시에 그 기업과 거래해야 하는 금융회사라는 점이 국내 행동주의의 큰 딜레마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최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기관투자가들이 적극적으로 수탁자 책임을 다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고 입을 모은다. 수탁자로서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과 금융그룹 차원의 영업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시장에서 '설득력 있는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주주서한조차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철회된 현실. 업계에서는 흥국운용의 '하루짜리 서한'이 한국형 행동주의가 넘어야 할 벽이 여전히 높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