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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본시장의 반도체 쏠림 현상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를 주도하던 빅테크들의 속도 조절 징후가 감지되고,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반도체 사이클의 단기 고점(Peak)을 경고하며 차익 실현을 권고하는 추세다. 국내 증시를 견인하는 반도체 대장주들의 극심한 주가 변동성은 이러한 시장의 팽배한 불안감을 반영한다.
짙어진 불확실성 속에서 증시의 '큰손'인 국민연금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특정 섹터에 편중된 리스크를 분산하고, 펀더멘털에 기반한 원칙적인 리밸런싱(자산 재배분)을 통해 1670조원에 달하는 노후 자금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현재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컨트롤타워는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다.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CIO)은 후임 인선 지연으로 올해 말까지 한시적 연장 근무 중이다. 거대 기금의 방향타를 쥔 실무 최고 책임자의 리더십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투자의 최전선에 자리 잡은 것은 냉철한 자본의 논리가 아닌 정무적 판단이다.
그 중심에는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있다. 금융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 출신 수장인 그는 최근 증권가의 '74조 매도 폭탄' 우려 보고서에 대해 "언제부터 애널리스트가 점쟁이 노릇 하게 됐나"라며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기금운용위원회의 공식적인 자산 배분 논의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최고 수장이 나서서 시장의 합리적 경고음을 사전 차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이사장의 과거 재임 시절(문재인 정부) 궤적을 복기하면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돌출 행동으로 보기 어려워 보인다. 2019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명분으로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을 당시, 시장에서는 정부의 '재벌 개혁' 기조에 맞춘 표적 개입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기금운용본부의 전주 이전 과정에서도 비슷한 궤를 찾을 수 있다. 척박한 금융 인프라로 인해 핵심 펀드매니저들의 대규모 인력 이탈이 발생했음에도, 기금 수익률의 잠재적 리스크보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무적 명분이 우선시됐다. 임기를 채우지 않고 21대 총선 출마를 위해 중도 사퇴한 이력 역시, 연금 수장 자리가 정치적 행보의 연장선에 있다는 비판을 뒷받침한다.
과거에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앞세워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현재는 '증시 부양'이라는 정부 어젠다와 맞물려 원칙적인 자산 배분마저 억누르는 소극적 방관을 택하고 있는 모양새다. 결국 김 이사장의 최근 발언은 현 정부가 핵심 치적으로 내세우는 '서남권 반도체 800조 메가 프로젝트'의 경제적 내러티브를 보호하려는 정무적 방어막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반도체 매도에 따른 지수 하락이 자칫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셈이다. 개입과 방관을 오가는 이 일관성 없는 잣대의 기준이 철저히 정치적 유불리에 기인한다는 점은 연금 거버넌스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이 남는다. 국민연금의 최우선 책무는 눈앞의 지수 하락을 막는 단기 방화벽 역할인가, 아니면 장기적 관점의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통해 국민 노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인가. 정상적인 자금 배분 기능을 지연시키면서까지 특정 산업 부양 기조에 코드를 맞추는 것은 연기금의 본질인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 국내 주식 목표 비중을 20.8%로 상향해 기계적 매도의 '룸(Room)'을 넓혔다. 여기에 최근의 급락장으로 보유 주식 평가액이 감소하며 비중 초과 문제가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를 두고 시장 안정화의 성과로 평가한다면 명백한 착시다. 폭락에 기대어 매도 타이밍을 뒤로 미뤘을 뿐, 누적된 60조원 규모의 잠재적 리밸런싱 물량은 주가 반등 시 언제든 시장을 짓누를 구조적 뇌관으로 남아 있다.
자본시장의 경고등이 켜진 현시점에서,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과정에 정치적 셈법이 개입할 공간이 있어선 안된다. 정무적 판단에 갇혀 리밸런싱의 적기를 놓친다면, 향후 반도체 사이클 하락 시 발생할 막대한 기회비용과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연기금 운용은 정치적 치적을 보위하는 수단이 아니라, 철저한 금융 논리와 독립된 거버넌스에 의해 작동해야 하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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