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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공개 지원과 국내 규제 논란이 이어지면서 국내 기업들의 미국 로비 활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때 통상 현안이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나 주목받던 일명 '워싱턴 대관'이 이제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방산, 배터리, 전기차(EV) 등 기업의 투자와 실적을 좌우하는 핵심 경영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로비공개법(Lobbying Disclosure Act·LDA)에 따라 공개된 올해 1분기 공시를 전수조사한 결과, 국내 주요 기업들은 미국 의회와 행정부를 상대로 직접 정책 대응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자체 대관 조직을 운영하는 기업도 있었고, 전문 로비업체를 활용해 정책 입안자들과 접촉하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이번 조사는 미국 상원 LDA 공시와 각 기업 및 로비업체 신고를 대조해 중복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집계했다.
시장에서는 최근 쿠팡 사례가 미국 로비를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제재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미국 정치권 인사들이 한국 정부에 우려를 전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업의 대관 활동이 통상과 외교 이슈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미국 정책 결정 과정이 국내 기업의 사업 환경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워싱턴 대응 역량 자체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 국내 기업들의 미국 로비 규모는 빠르게 커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미국 로비 비용은 2020년 1553만달러에서 2024년 3532만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첨단 제조 세액공제, 대중국 수출통제 등을 잇달아 도입했고 기업들도 정부 간 외교에만 의존하기보다 직접 정책 입안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대응 범위를 넓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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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A에 따르면 기업마다 워싱턴에서 '설명하는 사업'이 완전히 달랐다. 삼성은 반도체, 한화는 방산, SK는 공급망과 AI, 현대차는 자동차, LG는 배터리, 쿠팡은 플랫폼 규제에 초점을 맞췄다. 과거처럼 그룹 차원의 대관 조직이 모든 현안을 맡기보다 사업별 미국 법인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직접 설명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가장 세분화된 조직을 갖춘 곳은 삼성그룹이었다. 소비자가전과 모바일을 담당하는 삼성전자 미국법인(SEA), 반도체 사업을 맡는 Samsung Semiconductor(SSI), 삼성SDI 미국법인이 각각 다른 정책 의제를 담당했다.
특히 SSI가 별도로 로비 활동에 나선 점은 삼성의 미국 전략에서 반도체의 위상이 한층 커졌음을 보여준다. CHIPS Act와 AI 정책, 대중국 수출통제 등 반도체 산업과 직결되는 현안을 전담하며 사업부별 정책 대응 체계를 구축한 모습이다.
가장 큰 변화는 한화그룹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로비의 중심은 한화큐셀을 앞세운 태양광 정책 대응이었다. IRA와 태양광 보조금, 재생에너지 정책이 핵심 의제였다.
그러나 올해 1분기부턴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전면에 나서 국방예산과 방산 조달, 조선산업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루며 무게중심이 방산으로 이동했다. 한화큐셀이 태양광 정책 대응을 이어가는 가운데, 그룹 차원의 워싱턴 전략은 방산과 조선 등 신성장 사업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보였다. 최근 필리조선소 인수와 미국 함정 유지·보수(MRO) 사업 확대 등을 추진하는 그룹 전략이 로비 활동에도 그대로 반영됐다는 평가다.
계열사별로 가장 명확하게 역할을 나눈 곳은 SK였다. 그룹 차원의 공급망과 통상 대응은 SK 아메리카스가, 반도체 투자와 첨단산업 정책은 SK하이닉스 미국법인이 각각 맡았다. 미국 내 반도체와 AI 인프라, 에너지 투자 확대에 맞춰 그룹과 사업회사가 각자 필요한 정책 이슈를 담당하는 구조다.
삼성과 한화, SK가 복수의 외부 로비펌을 활용한 것과 달리 LG는 다른 길을 택했다. LG전자 미국법인은 외부 로비업체를 통하지 않고 자체 조직(In-house)으로 로비 활동을 신고했다. 전기차와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첨단 제조 세액공제 등을 중심으로 내부 조직이 직접 정책 대응을 맡는 방식이다.
현대차는 미국 생산 확대와 맞물려 IRA와 전기차, 관세 정책 대응에 집중했고, 쿠팡은 디지털 플랫폼과 전자상거래, 통상 현안을 주요 의제로 관리했다. 특히 쿠팡은 이번 조사 대상 가운데 미국 정치권의 공개 지원 사례가 알려지며 기업 로비가 외교·통상 이슈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대표 사례로 꼽힌다.
IB업계에서는 워싱턴 대관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에는 통상 분쟁이나 규제가 발생한 이후 대응하는 역할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단계부터 기업들이 직접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와 AI, 방산처럼 정부 정책이 시장을 좌우하는 산업이 늘어나면서 대관 조직도 사실상 투자 전략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외국계 변호사는 "미국 로비는 규제 대응뿐 아니라 투자 리스크를 관리하는 과정"이라며 "사업을 가장 잘 아는 현업 법인이 직접 워싱턴에 나와 정책을 설명하는 기업들이 실제 대응도 빠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