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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HD현대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선 화려한 금융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기선 회장은 아버지이자 지주사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으로부터 지분을 증여 받거나 장내에서 현금을 투입해 주식을 사들인 게 전부다.
HD의 경쟁사들은 이미 수 년 전 또는 수 십년 전부터 승계를 위한 밑그림을 그려왔고 이젠 후대 오너들이 전권을 쥐고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물론 투자자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우회로를 찾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 HD현대그룹의 승계 방식은 재계의 모법답안으로 불릴만하다. 한 발 늦은 타이밍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번에 정기선 회장이 증여 받는 주식은 HD현대 지분 3.54%(280만주)이다. 정 회장의 지분율은 기존 6.1%에서 9.7%로 높아지고, 정몽준 이사장의 지분율은 23%대로 낮아진다. 기존 2대주주는 국민연금이기 때문에 경영상의 변화는 없다. 지분율의 자체의 변동보단 정몽준 이사장이 직접 지분을 증여한 첫 사례란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018년 당시 현대중공업 부사장으로 재직중이던 정 회장은 KCC로부터 현재 지주회사인 HD현대의 전신인 현대로보틱스 지분 5.1%를 인수했다. 당시 지분가치는 약 3540억원이었는데 인수대금 대부분인 3000억원을 정몽준 이사장으로부터 증여 받았다.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2024년엔 약 3개월에 걸쳐 HD현대 주식 68만2500주를 사들인다. 평균 매입단가는 약 7만원, 총 매입액은 470억원 수준이었다.
이번에 증여 받는 주식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5838억원이다. 2년 전 장내 지분매입 당시와 비교하면 한 주당 매입 금액(약 21만원)이 3배가량 증가했다. 이번 승계에선 최대주주 지분에 대한 할증을 포함한 상속세율을 단순 대입해 세금으로만 약 350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기선 회장은 '승계의 정석' 행보를 보이고는 있지만, 앞으로 더 큰 숙제들이 남아있다는 점이 변수다.
HD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선 최소 30% 이상의 지분율 확보가 필수적이다. 현재 정몽준 이사장과 아산사회복지재단 등 특수관계인 관계인 지분을 모두 합친 지분율은 37% 남짓이다. 지주사의 시가총액은 17조~20조원 수준에 불과하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지분율이 약 27%에 달한다.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정몽준 이사장의 지분을 정 회장이 오롯이 승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단 의미이다.
정몽준 이사장의 HD현대 지분율은 약 23%, 시가로 약 4조원 규모다. 이마저도 최근의 주가 하락을 반영한 수치인데, 두 달 전 신고가 (33만원) 기준으론 약 6조원에 달한다. 현재 시점에 증여가 전량 이뤄진다고 가정하면 세금 납부를 위해 약 3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 기준으론 역대 최고 수준이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고 불린 삼성그룹 오너일가의 상속세는 총 12조원이었다.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이 3조1000억원, 이재용 회장이 2조900억원,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이 각각 2조6000억, 2조4000억원 수준이었다. 5년간 6차례 연부연납 과정에서 삼성 오너일가는 삼성전자와 삼성SDS, 삼성물산 등 핵심 계열사들을 매각을 통해 재원을 마련했고, 2021년 상속세 신고 이후 6년만에 모두 완납할 수 있었다.
이들과 달리 정기선 회장에겐 활용 가능한 재원이 거의 없다. 2대주주로 등극한 HD현대 지분 6.1%를 제외하고, HD한국조선해양(544주. 0%), HD현대마린솔루션(0주), HD현대일렉트릭(156주, 0%), HD현대건설기계(152주, 0%) 등 핵심 상장 계열사에서 유의미한 지분은 사실상 없다.
배당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데도 한계가 분명하다. 지난해 정 회장이 수령한 배당금은 약 173억원, 지난 5년(2021~2025년)간 HD현대로부터 받은 배당금을 모두 합쳐도 1000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다행히(?) 지난해 배당소득 50억원 구간의 최고세율을 최대 45%에서 30%로) 낮추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통과했지만, 이를 고려해도 유의미한 소득 증가를 기대하긴 어렵다.
다른 그룹사들과 마찬가지로 HD현대그룹에도 승계를 위한 '골든타임'이 있었다.
경쟁사인 한화그룹은 이미 수 십 년 전 오너일가 가족 회사를 설립해 승계의 발판을 만들었고 수시로 기회를 포착해 지주사 지분율을 꾸준히 늘렸다. 각종 금융기법을 동원한 일련의 과정들이 오너 일가 승계를 위한 포석이란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그 결과 세대교체를 완성할 수 있었고 이젠 새로운 오너의 시대를 앞두고 있다. 친족 그룹인 현대차그룹 역시, 정의선 회장 개인 명의로 신사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상속 재원 마련을 위한 준비를 얼추 마쳤단 평가를 받는다.
HD현대는 오랜 기간 지주사 디스카운트, 즉 순자산가치(NAV) 대비 높은 할인율을 기록하며 만년 저평가 주식으로 평가 받아왔다. 정기선 회장이 부사장부터 수석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승계 구도가 점차 명확해지면서 지분 승계에 대한 불확실성은 매번 거론됐었지만, 오너일가 또는 그룹차원에선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크고 작은 M&A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도, 정기선 회장의 승계를 위한 밑그림으로 여길만한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정공법을 택하는 가풍(家風)이라는 평도 있지만 상속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많지 않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룹의 숙원 사업인 HD현대오일뱅크 상장은 수차례 무산됐다. 업황이 호조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다시 상장 추진할 것으로 예단하긴 어렵다. 이달부터 강화된 중복상장 기준으로 인해 핵심 계열사 HD현대로보틱스의 상장 역시 불투명해졌다. 두 회사 모두 정 회장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다. 다만 상장에 성공한다면 지주사의 특별배당 또는 거버넌스 개편을 통한 다양한 재원 마련 방안을 구상할 여지가 있었다.
정기선 회장의 상속 재원 마련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히 개인 차원의 일로만 치부하긴 어렵다.
HD현대의 기업가치 상승은 곧 상속세 부담이 급증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조선, 방산, 석화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자연스럽게 지주사의 가치가 상승하면 주주들에겐 박수를 받겠지만, 오너 개인적으론 부담이 증가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 HD현대의 각종 투자와 거버넌스 개편, 배당 정책 심지어 주가 흐름까지 경영을 위한 선택 하나하나가 정 회장의 승계와 연관돼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