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가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번째 팹(Fab)을 2029년까지 완공한다는 목표를 내놓으면서 투자업계 시선이 복잡해지고 있다. 정부가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주는 데에는 이견이 크지 않으나, 시장이 파악하고 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존 투자계획과 충돌하는 지점이 늘어나는 탓이다. 양사가 결정하고 발표할 영역까지 정부가 앞장서 못을 박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최근 호남권 반도체 팹의 1차 완공 시점으로 2029년을 제시했다. 당초 2030년 목표보다 1년 앞당겨 구체적 완공 시점을 제시한 것이다. 우선 1~2개 팹을 1차 완공 대상으로 검토하되 여건이 갖춰지는 대로 1개 팹부터 먼저 건설하는 방안도 열어뒀다.
산업통상부·기후에너지환경부·국토교통부 등 유관부처도 관련 절차를 서두르고 있다. 광주 군공항 기능을 2028년까지 다른 군 기지로 임시 배치하고 국가산단을 조성하는 동시에 전력 공급 일정도 당초보다 앞당겨야 한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전체에 필요한 전력 규모가 6.3기가와트(GW), 용수가 하루 65만톤 규모로 추산되는 만큼 실제 속도전에 돌입한 것이다.
투자업계에서는 정부가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다. 팹 건설에 필요한 리드타임이 통상 3년 안팎이지만 대규모 송전망이나 용수 확보, 부지·산단 조성 등은 주민 수용성이나 인허가 문제로 10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팹을 지으려 할 때 전력과 용수를 뒤늦게 끌어오는 기존 방식으로는 현재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인프라업계 한 관계자는 "이미 작년 연말부터 정부가 너무 늦다는 말이 많았는데, 지금부터라도 인프라 구축에 속도전을 내는 것 자체는 적합하다고 본다"라며 "물론 목표 일정대로 송전망을 깔고, 전력과 용수 공급 계획을 완수할 수 있을지는 신중하게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인프라는 실제 반도체 수요에 앞서 조성해두더라도 일종의 전략자산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반도체업계에서도 중장기적으로는 현재 경기권 남부까지 내려온 반도체 산단을 서남권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AI가 전방 수요를 천문학적 규모로 키워내는 시기인 만큼 정부가 부지와 전력, 용수를 미리 확보해두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향후 메모리 수급이나 기술 변화에 맞춰 탄력적으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문제는 현재 정부가 주도하는 속도전의 기준이 팹 완공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전력·용수·부지·산단 등 인프라 조성까지는 정부 몫이지만, 팹 완공에 필요한 설비투자(CAPEX) 등 대규모 자본배분 판단은 민간 몫이다. 정부가 속도를 낼 수 있는 영역과 기업이 결정해야 할 영역이 분리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기저기 불안한 목소리가 전해진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정부는 5년 임기를 기준으로, 경영진은 2~3년 임기로, 주주는 분기 실적이나 주가, 주주환원 등 훨씬 짧은 시간축으로 반도체 산업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양상"이라며 "한국 반도체 생태계로 보면 10년 이상 초장기로 접근해야 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미스매치가 누적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11일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점검회의 결과를 보고하며 "2029년 팹 1차 완공을 목표"로 관련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직접 밝혔다.
반도체업계 시선으로 풀어보자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 적어도 한 곳은 정부가 세운 목표에 맞춰 CAPEX를 집행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팹 완공이 장비를 반입하고 웨이퍼를 실제 투입하는 수준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클린룸 등 인프라 확보 단계에서부터 양사 CAPEX 투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양사가 사전에 협의한 사안이라 해도 민간기업의 대규모 투자 시점을 정부가 먼저 못박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우려도 전해진다.
투자업계가 파악해온 양사의 증설·공정 로드맵과 자본배분 계획에 올해 들어 변수가 잇따라 추가되며 혼란스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정부가 밝힌 호남 팹 속도전이 기존 용인·평택 등 수도권 투자계획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다.
양사 모두 평택과 용인을 중심으로 이미 10년여에 걸친 대규모 반도체 투자계획을 진행해왔다. 정부 목표대로 호남권에 추가 팹을 건설해야 한다면 기존에 예정된 팹 가운데 일부를 호남으로 옮길 것인지, 기존 투자를 유지하면서 호남 투자를 추가할 것인지가 시장에선 중요한 변수가 된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피지컬 AI까지 전방 시장이 쭉쭉 커져서 메모리 수요가 폭증한다면 정부 일정에 맞춰 양사가 CAPEX를 선제적으로 늘리는 게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다"라며 "반대로 수요가 예상에 못 미치면 그대로 공급과잉이 된다. 반도체 산업에선 과잉투자 대가 역시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