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 투자가 정무적 판단에 끌려다니는 양상이 반복된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정부가 호남 팹(Fab) 완공 시점을 2029년으로 못 박은 것이나, 대미(對美) 전략투자 협상 목록에 메모리 반도체가 포함된다는 관측까지 나오면서다.
정치권에서 메모리 사업의 막강한 현금창출력을 바탕으로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투자 시나리오까지 잇달아 내놓으면서 양사 중장기 투자 로드맵을 둘러싼 불확실성만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최근 호남권 반도체 팹의 1차 완공 시점을 2029년 하반기로 제시하고 유관부처와 인프라 구축 속도전에 돌입했다. 통상 팹 착공부터 클린룸 확보에 필요한 시간을 기준으로 역산해보면 내년 상반기 중에는 양사 이사회가 사업 계획을 승인해야 하고 하반기부터는 설비투자(CAPEX) 투입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호남 팹의 상업가동 목표 시점을 2030년 6월말로 잡고 있다.
지난 7월 양사가 각각 4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밝혀두긴 했으나, 다소 무리한 일정표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군공항 이전에 필요한 행정 절차부터도 계획대로 흘러가기 어려울 수 있는 탓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미 전략투자 협상 테이블에 현지 메모리 전공정 팹 건설 카드가 올랐다는 관측까지 제기되면서 투자업계 혼란이 커지는 모습이다.
정작 반도체·인프라 등 관련 업계에서는 한 발짝 떨어진 입장을 취하는 분위기다. 두 사안 모두 사업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실무적 판단보다는 정치권 필요로 불거진 일시적 잡음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시각이다.
우선 대미 전략투자 대상에 메모리를 포함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이번 대미 전략투자는 미국 측이 투자 특수목적법인(SPV)을 설립하고 한국이 자금을 대는 식으로 진행된다. SPV가 프로젝트 전반 관리 주체인 데다 미국 정부가 대상 사업 선정부터 관리까지 깊숙이 관여하는 구조다. 메모리의 경우 국가전략기술의 관리·보호 문제가 얽혀 있어 이번 전략투자 대상에 포함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크다는 평이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미국 측에서 일본보다 결정이 늦어진다는 점을 이유로 꽤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이 때문에 산업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사실로 파악된다"라며 "그러나 앞서 체결한 양해각서(MOU) 자체가 국내법과 상충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국가전략기술이 포함된 반도체 생산시설은 이번 전략투자 틀에 담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월 SK하이닉스의 ADR 상장 이후 미국 현지 전공정 팹 투자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기는 했으나, 이 역시 이번 사안과는 별개라는 분석이 많다.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력과 용수·전력·부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조건이라면 증설 계획을 유연하게 가져가겠다는 취지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과 정치권의 시간표가 따로 움직이는 셈이다. 호남 팹 속도전이나 미국 현지 전공정 팹 진출 모두 불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나, 양사가 실제 투자 여부를 판단하기 이른 시점인데도 정부·정치권 논의가 지나치게 앞서가면서 온도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호남 팹 논의만 해도 6월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취하다가 한 달여 만에 메가프로젝트 구상이 나왔지 않나"라며 "물리적으로 이사회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업 계획의 윤곽조차 잡기 어려운 시간이다. 호남이건 미국이건 사업적 판단이 뒷받침하면 할 수 있는 문제인데, 사업 외적인 변수들이 자꾸 속도전을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장에선 양사를 비롯한 주요 메모리 업체의 중장기 증설·공정 로드맵에 호남 팹이나 미국 현지 전공정 투자를 아직 반영하지 않고 있다. 양사 이사회에서 투자 승인을 마친 용인·평택·청주 등 기존 생산거점을 중심으로 신규 팹 가동 시점과 생산능력 증가분을 추산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메모리 수급과 자본배분 계획을 전망하는 식이다.
이미 집행 중인 기존 투자계획 역시 조기 완공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기도 하다. 여전히 전력·용수 확보 문제가 병목을 일으키고 있는데, 경기도 등 지자체 차원에서 양사에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이 때문에 아직 착공 시점은 물론 전력·용수 등 인프라 가시성이 떨어지는 예비 사업들은 구체화한 계획으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마무리된 만큼 앞질러가던 반도체 투자 논의도 차츰 안정을 찾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김민석 신임 대표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발판으로 당권을 확보했고, 선거 과정에서도 이재명 정부와의 긴밀한 공조를 강조해왔다. 투자업계에서는 정치권이 당권 경쟁 과정에서 민심을 겨냥해 부각해온 대규모 반도체 투자 구상도 실제 투자 여건이나 시간표에 맞춰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호남 팹의 경우 2029년 완공은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기존 법제와 충돌하는 지점도 많고 주민 수용성 등 정부나 민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변수도 많아서 차츰 현실적 타임라인으로 조정이 되지 않을까 본다"라며 "그럼에도 양사 현금창출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정무적 판단에 따라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일이 반복될 것 같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