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 밖이면 잔류 확정?…공공기관 흔드는 '받글 정치'
입력 2026.08.24 07:00

취재노트
정부 발표 앞두고 SNS 예상 명단 수시로 '버전업'
대상·배치 기준 안갯속…기관 내부 불안 확산
공제회·농협까지 이전설…법적 범위도 혼선
공식 정보 공백 속 기관별 대응·이해관계 분화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 발표를 앞두고 수도권 소재 금융·공공기관 내부가 출처 불명의 '받글'에 흔들리고 있다. 정부가 수도권 잔류 최소화와 기능별 집적이라는 원칙을 제시했지만, 구체적인 대상과 선정 기준·협의 절차는 공개하지 않으면서다. 

    메신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예상 명단이 수시로 유통되자 자기 기관의 포함 여부에 따라 내부 분위기와 대응 수위도 엇갈리고 있다.

    21일 금융권과 공공기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과 소속기관 등 350여곳을 폭넓게 놓고 2차 지방이전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르면 이달 말 기본 방향이 공개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올해 안에 이전계획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선도기관을 중심으로 이전에 착수한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다만 구체적인 이전 대상과 행선지, 기관별 이전 시기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중앙행정기관 이전은 행정안전부, 공공기관 이전은 국토교통부가 각각 맡아 추진한다. 기관별 법적 성격과 이전에 필요한 절차도 제각각이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면서 빈자리는 이른바 '받글(받은 글)'이 채우고 있다. 기관명과 예상 이전 지역을 표로 정리하거나 정부·국토부 관계자의 발언을 요약했다는 형식을 갖춘 글이다.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기관 내부에서는 정부 발표 못지않은 관심을 받는다.

    문건을 받은 직원들은 자기 직장 이름이 들어 있는지부터 찾아본다. 

    명단에 없으면 "이번에는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안도가 나오고, 포함돼 있으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내용"이라는 반박이 뒤따른다.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정부 검토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불안한 직원들에게는 일종의 '잔류 신호'처럼 받아들여진다.

    지난달에는 '국토부 과장 발언 요약'이라는 제목을 단 문건이 금융권과 공공기관에 확산하기도 했다. 금융당국과 한국은행은 세종, 한국투자공사(KIC)와 주요 공제회는 전주, 농협 계열사는 부산과 나주로 간다는 식으로 기관별 행선지까지 구체적으로 적혔다.

    국토부는 곧바로 이전 대상과 지역이 전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최근 수개월 동안 특정 기관과 지역을 연결한 정보지가 20개 넘게 유통됐다는 설명도 내놨다. 하지만 정부의 반박 이후에도 받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기관이 추가되거나 빠지고 예상 행선지가 달라진 새로운 버전이 계속 등장했다.

    받글이 그럴듯하게 소비되는 데는 중앙부처와 공공기관, 금융기관 이전 논의가 뒤섞여 진행되는 영향도 있다. 실제로는 주무부처와 적용 법률, 의사결정 절차가 서로 다르지만 받글 속에서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국책은행, 공제회와 농협 등이 하나의 표에 나란히 놓인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유치 희망 기관을 발표하는 것도 혼선을 키우는 요인이다. 지역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기관을 유치 대상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한데도, 유통 과정에서 어느 순간 '정부 검토안'으로 포장돼 서울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특정 지역이 데려가고 싶다고 밝힌 기관이 정부가 실제로 내려보낼 기관처럼 둔갑하는 셈이다.

    이전설에 이름이 자주 오르는 기관들은 이미 공개 대응에 나섰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노조는 공동 집회를 열었고 금감원 노조도 지방이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농협과 예금보험공사 등에서도 집회와 토론회, 설문조사 등을 통해 정부에 기관별 특수성을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기관마다 내세우는 근거는 다르다. 금감원은 금융회사 본점과 금융민원, 현장검사 대상 대부분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독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면 직원들이 금융회사를 찾아 서울로 '역출장'을 다니면서 감독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책은행은 기업과 자본시장이 밀집한 서울에서 정책금융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전이 현실화하면 기업금융과 국제금융 분야 전문인력이 이탈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예금보험공사는 금융위기 발생 시 즉각 대응해야 하는 기관이라는 기능적 특수성을 앞세우고 있다.

    공제회와 농협·수협은 자신들이 현행법상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제회는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기관이 아니라 회원들이 낸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간 자조기구라는 입장이다. 공공기관운영법도 구성원 간 상호부조와 복리 증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기관들은 이처럼 업무 특성과 법적 지위를 근거로 일률적인 이전에 반대하고 있다. 금융시장과의 접근성이 필요한 기관, 위기 발생 시 즉각 대응해야 하는 기관, 설립법상 소재지가 서울로 규정된 기관, 현행법상 공공기관에 해당하지 않는 조직까지 사정도 제각각이다. 정부가 이런 차이를 이전 대상 선정 과정에서 어떤 기준으로 반영할지가 향후 쟁점으로 꼽힌다.

    정부가 기능이 비슷한 기관을 특정 지역에 모으는 '집적'을 2차 이전의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기관별 이해관계도 복잡해지고 있다. 자기 기관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업권이나 유관기관과의 차이를 부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다른 기관을 이전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리보다 행정 기능이 강한 기관이 더 적합하지 않느냐"거나 "이미 지방 조직이 있는 기관부터 확대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한 기관의 '서울 잔류 논리'가 다른 기관의 '지방 이전 논리'로 읽힐 수 있는 구조다.

    지방이전 자체에는 공동으로 반대하면서도 기관별 기능과 법적 지위, 예상 행선지에 따라 대응 온도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자기 기관이 빠진 문건에는 안도하면서 다른 기관이 포함된 문건에는 상대적으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공식 명단이 나오기도 전에 기관별 이해관계가 먼저 분화하는 모습이다.

    기관들의 반발 배경에는 업무 효율뿐 아니라 직원들의 현실적인 생활 문제도 자리 잡고 있다. 사회공공연구원이 수도권 공공기관 직원 2632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5.7%는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역균형발전 필요성에 공감했다. 반면 공공기관 지방이전에는 74.8%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전이 현실화하면 퇴사를 고려하겠다는 응답은 33.6%였고, 가족 전체가 함께 이주하겠다는 응답은 7.7%에 불과했다. 배우자의 직장과 자녀 교육, 주거 문제가 얽힌 직원들에게 지방이전은 추상적인 균형발전 정책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다시 짜야 하는 인사발령에 가깝다.

    지방이전이 거론되는 한 기관의 실무급 관계자는 "지방이전 이야기는 과거에도 꾸준히 나왔지만 현 정부의 추진 의지가 강하다는 이야기가 많아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크다"며 "받글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말했다.

    정부가 '수도권 잔류 최소화'와 '기능별 집적'을 강조하면서도 대상 선정 기준과 기관·노조와의 협의 절차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은 사이, 출처 불명의 명단이 정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지자체와 지역 정치권이 발표한 유치 희망 기관까지 정부 검토안으로 둔갑해 돌아다니면서 기관 내부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지방이전은 유사한 기관을 지역에 모아 균형발전 효과를 높이겠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공식 발표를 기다리는 현재의 풍경은 '집적'보다 '각자도생'에 가깝다. 이를 기관들의 서울 사수 논리로만 보기 전에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디로 이전하는지에 대한 정부의 설명이 충분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받글에서 자기 기관의 이름이 빠졌다고 안심하기에는 다음 명단이 너무 빨리 돌아오고, 이를 바로잡을 공식 정보는 여전히 더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