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 공개하는데 채점표는 제각각…생산적금융 팩트북 앞두고 현장 혼선
입력 2026.08.28 07:00

금감원, 6월부터 금융사별 실적 취합
업종·상품·집행시점마다 인정 기준 달라
SPC 대출·인수금융 포함 여부도 제각각
비교 가능한 공통 공시항목 필요성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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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금융회사의 '생산적 금융' 실적을 담은 첫 '팩트북' 공개를 앞두고 현장에서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부터 주요 금융그룹과 금융사에 집계표를 보내 실적을 취합하기 시작했지만, 어떤 업종과 거래를 생산적 금융으로 인정할지에 대한 공통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거래라도 산업분류와 투자기구, 자금 집행 시점에 따라 실적에 포함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한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연말 팩트북이 금융회사별 생산적 금융 성과를 비교하는 성적표로 활용되려면 각 사의 숫자뿐 아니라 산출 기준부터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은 지난 6월부터 자체적으로 마련한 집계 양식에 따라 금융회사별 생산적 금융 실적을 받아보고 있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5월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그룹에 생산적 금융 대상 업종과 대출 유형, 취급 구조 등에 관한 자료를 요구했다. 이후 월별 또는 분기별 실적을 파악하기 위한 숫자 취합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이 배포한 집계표를 확정된 공통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금융회사들이 자체 기준으로 분류한 실적을 받아보면서 업종과 상품별 차이를 확인하는 초기 단계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금감원이 6월을 시작으로 자체 집계표를 보내 숫자를 받아가기 시작했다"며 "아직 정식 공통 기준이라기보다 몇 달간 현황을 파악하는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5월 열린 '금융업권 생산적 금융협의체'에서 금융회사들이 매년 4분기 생산적 금융 추진 실적을 담은 팩트북을 작성해 공개하도록 주문했다.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실적을 검증하고 정부와 전문가, 시장 참여자 등의 평가를 받게 한다는 취지다.

    금융당국이 '무늬만 생산적 금융'이나 '실적 부풀리기' 논란을 막기 위해 팩트북을 제시했지만, 정작 생산적 금융의 범위는 금융회사 자율에 맡겨져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위는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각 금융회사의 고객 기반과 영업 전략, 전문 분야를 살릴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 금융그룹별 대상 업종부터 차이가 크다. 지난 5월 금감원 자료 제출 당시 알려진 기준에 따르면 한국표준산업분류상 1205개 세부 업종 가운데 하나금융은 1097개 업종을 생산적 금융 대상으로 분류했다. KB금융은 512개, 우리금융과 NH농협금융은 각각 471개, 신한금융은 291개였다. 가장 넓은 기준을 적용한 그룹과 가장 좁은 그룹의 대상 업종 수가 세 배 넘게 차이 난다.

    분류 범위를 일률적으로 좁히기도 쉽지 않다. 첨단산업이나 혁신기업을 지원하는 거래라도 차주의 주된 업종이 금융업 등으로 분류되면 실적에서 제외될 수 있다. 반대로 대상 업종을 폭넓게 잡으면 기존 기업대출 상당 부분이 생산적 금융으로 재분류돼 신규 자금공급 효과가 부풀려질 가능성이 있다.

    거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엇갈린다. 특수목적회사(SPC)를 통한 대출이나 인수금융, 차환 목적 거래를 생산적 금융에 넣을지가 대표적이다. 자금이 기업의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사용된다면 포함할 수 있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단순 지분 인수나 기존 대출 상환에 그친다면 신규 생산능력 확충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4대 금융지주가 큰 항목은 맞췄지만 하위 기준은 상당히 달랐다"며 "SPC 대출이나 인수금융을 넣을지 빼는 것도 회사마다 달랐고, 제외하면 숫자가 작아 보이는 만큼 산업분류표에 맞춰 포함 범위를 넓힌 곳도 있다"고 전했다.

    증권업에서는 투자기구에 따라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문제도 있다. 

    성장기업에 동일한 자금이 공급되더라도 신기술사업투자조합이나 벤처펀드를 통하면 모험자본 실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기관전용 사모펀드(PEF)를 통하면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모험자본 공급 실적에서 빠질 가능성이 있다. PEF에는 기업 투자뿐 아니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다양한 자산이 들어갈 수 있어 투자기구만으로 일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등 새롭게 등장한 산업 인프라도 경계선에 놓여 있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산업에 필요한 핵심 시설이지만 기존 인프라 분류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일부 회사는 '인프라 및 관련 산업'처럼 범위를 넓게 해석해 실적에 반영하는 반면, 보수적인 회사는 제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정액과 실제 집행액 가운데 어느 숫자를 실적으로 볼지도 쟁점이다. 블라인드펀드는 올해 출자약정을 체결하더라도 실제 출자금 납입은 내년에 이뤄질 수 있다. 반면 특정 기업에 투자하는 프로젝트펀드는 결성 직후 자금이 집행돼 올해 실적에 바로 반영된다.

    금융당국의 생산적 금융 발표 자료에는 일부 사업의 공급계획이 약정액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개별 투자 실적을 제출할 때는 실제 시장에 투입된 금액을 중심으로 집계하는 경우도 있다. 팩트북에서 약정액과 납입액, 승인액과 집행액을 구분하지 않으면 회사별 수치를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금융회사 내부의 집계 과정도 간단하지 않다. 증권사의 생산적 금융 거래는 투자은행(IB) 부문뿐 아니라 자기자본투자, 세일즈앤드트레이딩(S&T), 전략투자 등 여러 조직에 흩어져 있다. 부서 사이 정보교류 차단장치가 적용되는 거래도 있어 전사 실적을 한꺼번에 확인하고 중복 여부를 검증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팩트북 공개가 가까워질수록 숫자를 둘러싼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회사별 생산적 금융 실적이 정책 이행도와 경영진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로 활용되면 신규 공급보다 기존 거래를 생산적 금융으로 재분류하거나 단기간 집행할 수 있는 거래를 앞당길 유인도 커질 수 있다.

    모든 회사에 동일한 산업 목록과 상품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해법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각 금융회사가 강점을 가진 산업과 위험관리 역량이 다른 만큼 자율적인 영역은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신 팩트북에서 공통 기준으로 산출한 핵심 실적과 회사별 자체 기준에 따른 추가 실적을 분리해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약정액과 실제 집행액, 신규 공급과 차환·재금융, 직접투자와 펀드 출자, 그룹 내부 거래와 외부 공급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회사별 생산적 금융의 정의와 대상 업종, 제외 기준을 함께 공개해야 숫자의 크기보다 실제 자금공급 효과를 평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실적 경쟁이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10~11월이면 연말 성적표를 놓고 다시 숫자 경쟁이 시작될 것"이라며 "팩트북이 단순한 홍보자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떤 거래를 어떤 기준으로 집계했는지부터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