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이어 삼성·현대차까지…그룹 사업 중심축 부상한 '에너지'
입력 2026.08.31 07:00

AI·반도체 투자 속도전에 전력 확보가 핵심 변수로
SK, 이노-E&S 합병 효과…삼성·현대차 역량 재정비
美도 DC 사업자 직접 부담 기조…해외시장 열린 셈
GS·한화 등 기존 대기업 에너지 사업도 재평가 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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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주요 대기업의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에너지가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인프라와 반도체 팹(Fab) 투자가 늘면서 전력 확보 문제가 신규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떠오른 영향이다. 한동안 발전·플랜트 사업에서 힘을 빼왔던 그룹들까지 관련 조직과 사업 영역을 다시 넓히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제조 대기업 그룹에서 전력은 외부에서 조달하는 생산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발전이나 전력망 구축은 어디까지나 정부, 한국전력공사 등 공공부문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룹 내 건설사 역시 발전소나 공장을 설계·시공하는 역할에 주력했다. 그러나 AI 인프라의 전력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이 같은 역할 구분이 빠르게 흐려지는 분위기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직접 팹을 지어야 하는 삼성, SK그룹은 물론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하는 현대차, LG, GS그룹까지 전력망 구축이 병목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라며 "기존 산업을 확장하건 신사업을 키우건 전력 변수를 공공부문에 맡겨놨다가는 적기 확보가 안 될 것이라 보고 다시 역량을 내재화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에너지 부문에서 부침을 겪던 SK그룹은 현재 가장 유리한 입지를 점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학 불안이 커지면서 정유·석유화학 설비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된 데다 AI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면서 SK E&S의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이나 SK온의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당초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재편 성격이 강했던 SK이노베이션과 E&S 합병이 결과적으로 정유와 LNG 발전·ESS를 아우르는 종합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효과로 이어진 셈이다. 

    SK그룹이 연초부터 반도체 팹 증설이나 AI 인프라 사업에서 다른 그룹사보다 속도를 낼 수 있는 것도 정유·LNG 트레이딩부터 정제·발전·솔루션 사업까지 밸류체인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그룹 포트폴리오 안에서 AI 인프라 사업 전반을 연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작년 하반기 일찌감치 AI·반도체와 에너지를 양대 사업축으로 설정하고 관련 투자유치와 파트너십 구축을 순차적으로 밟아가고 있다. 

  • 최근 삼성그룹의 전략 기조가 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4월 삼성SDS가 이례적으로 KKR에 지분을 개방한 데 이어 현재는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한 삼성물산이 에너지 사업 확대를 위해 재무적투자자(FI) 유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동안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설계·조달·시공(EPC) TF 역시 최근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관련 사업부문 또는 별도법인 신설 방안을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팹을 늘리건 자체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건 직접 그리드(전력망)를 구축하기 어려우면 외부에 의존해야 한다"라며 "10년 전 그룹 승계와 사업재편에 돌입할 당시만 해도 중공업과 규제산업 미래를 밝게 보지 않았지만, 지금 AI 시장은 오히려 전통 굴뚝산업처럼 대규모 설비투자(CAPEX)를 전제로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통 발전사업의 비중을 낮춰온 현대차그룹에서도 변화가 관측된다. 현대건설은 최근 플랜트사업본부 산하에 발전사업팀을 신설하고 국내외 신규 발전 프로젝트 발굴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 2021년 탈(脫)석탄 정책을 선언하고 발전사업의 무게중심을 원전과 신재생에너지로 옮기고 가스발전을 비롯한 전통 발전사업을 크게 축소해왔지만, AI 인프라를 중심으로 탄력적 발전원인 가스발전 수요가 늘어나자 과거 강점을 보유했던 사업을 다시 키우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과 SK, 현대차그룹은 각각 엔비디아와 맞손을 잡고 반도체·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을 기반으로 AI 팩토리와 피지컬 AI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3사 모두 엔비디아로부터 대규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도입할 예정이지만, 대규모 AI 인프라를 직접 개발·운영한 경험은 제한적이다. 엔비디아와의 중장기 협력을 구체화하려면 데이터센터(DC) 개발부터 발전원 확보와 전력망 구축까지 그룹 차원의 대응 역량을 갖춰야 한다. 관련 경험이 풍부한 글로벌 인프라펀드를 FI로 끌어들이더라도 내부에 발전과 EPC 역량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AI 투자 속도를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인프라 투자가 가장 활발한 미국에서도 신규 DC에 필요한 전력 인프라를 사업자가 직접 확보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가 바뀌고 있다. 미국 백악관은 지난 3월 아마존과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주요 빅테크가 신규 DC 가동에 필요한 발전원을 직접 건설하거나 확보하고, 전력망 증설에 필요한 비용도 직접 부담하도록 하는 방향의 원칙을 제시했다. 기존 전력망에 AI 수요를 그대로 떠넘기기보다 신규 수요자가 필요한 발전원과 전력 인프라를 함께 책임지도록 하는 구조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국내에서도 한전 자본력이 부족하니까 민자 유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데, 삼성이나 SK, 현대차 입장에서 보면 해외 시장까지 열리고 있는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라며 "당장은 자체 AI 인프라 수요에 대응하는 게 중요하겠지만 해외 사업 기회도 따라오는 구조라서 중장기 그룹의 핵심 먹거리가 될 거라고 보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GS와 한화처럼 발전과 에너지 사업을 본업으로 보유한 그룹의 경쟁력이 부각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미 발전사업 개발과 운영 경험, 전력 거래와 EPC 등 관련 밸류체인 상당 부분을 본업으로 꾸려왔기 때문이다.

    GS그룹이 최근 정부 주도 메가프로젝트에 핵심 기업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제조업 중심 그룹들이 발전사업을 다시 키우거나 외부 파트너를 확보하는 동안 기존 발전자산과 운영 경험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하반기 이후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력 소식이 구체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AI 확산을 계기로 대기업집단의 에너지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지는 대표 사례로도 오르내린다. 

    한화그룹은 한화에너지를 중심으로 미국 현지에서 발전사업 개발과 전력구매계약(PPA) 사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그룹 내 발전설비 역량을 결합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화엔진도 DC용 발전설비 시장 진출을 준비하며 한화에너지가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설비를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