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한목소리 증권사들? 기금형 퇴직연금 속내는 '제각각'
입력 2026.09.04 07:00

금융CEO 간담회 15일 순연…구체안 공개도 지연
상위사는 방어, 후발사는 기금형 '판 리셋' 기대
적립금·인지도 굳힌 계약형…수익률만으론 역전 난망
국민연금 참여·수탁법인 설계 따라 이해득실 갈릴 듯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앞두고 금융투자업계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겉으로는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 시장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공통적으로 나오지만, 이미 막대한 적립금을 쌓은 선두 사업자와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려야 하는 후발 사업자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없어서다. 

    정부의 세부안 발표가 늦어지면서 금융사들도 공식적인 입장을 정하기보다는 제도 설계 방향을 주시하는 분위기다.

    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전날 예정했던 주요 퇴직연금사업자 대표 간담회를 오는 15일로 연기했다. 

    당초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등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세부안 발표가 지연되면서 사업자들에게 충분한 사전 검토 기간을 주기 위해 일정을 미룬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8월 중으로 예상됐던 구체안 공개도 9월로 넘어왔다.

    기금형 도입이라는 큰 방향에는 사실상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노사정은 지난 2월 기존 계약형을 유지하면서 금융기관 개방형,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등 다양한 기금형 퇴직연금을 병행하는 데 합의했다. 모든 사업장의 퇴직급여를 단계적으로 사외 적립하는 방향에도 뜻을 모았다. 정부는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증권사들의 속내는 '기금형 도입 찬반'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나누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시장에서 가진 지위에 따라 기금형이 기존 영업 기반을 흔드는 위협이 될 수도, 반대로 고착된 판을 다시 짤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연금 담당 관계자는 "현재 판에서는 이미 고객들의 인식이나 사업자 순위가 상당히 굳어져 있기 때문에, 새 제도에서 다시 출발한다면 후발 사업자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장 구조를 보면 이 같은 온도 차가 생기는 이유가 뚜렷하다.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비교공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553조8779억원으로 전분기보다 45조원 넘게 늘었다. 이 가운데 증권사 적립금은 165조원 안팎으로 전체의 약 30%까지 올라왔다. 미래에셋증권의 적립금만 약 52조원으로 증권업계 1위였고 삼성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각각 28조원, 26조원대로 뒤를 이었다.

    올해 증시 강세와 상장지수펀드(ETF) 투자 확대까지 겹치면서 기존 계약형 시장에서 증권사로의 자금 유입도 가팔라지고 있다. 

    2024년 10월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이후 올해 6월 말까지 증권사에는 4조1513억원이 순유입된 반면 은행에서는 3조9714억원이 순유출됐다. 이미 투자형 연금 시장에서 승기를 잡은 대형 증권사 입장에서는 현재 구조를 크게 바꿀 유인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셈이다.

    반대로 후발 사업자들은 현재 계약형 시장 자체가 선두 업체에 유리하게 굳어져 있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기업이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할 때 수익률뿐 아니라 전체 적립금 규모, 브랜드 인지도, 고용노동부 우수 퇴직연금사업자 선정 여부 등 정량·정성 지표를 함께 평가하다 보니 이미 규모를 확보한 업체가 다시 높은 점수를 받는 구조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한 퇴직연금 업계 관계자는 "수익률만으로 사업자를 선택하는 시장이 아니다"라며 "적립금 순위와 인지도 같은 항목의 비중이 적지 않아 후발 사업자가 좋은 운용 성과를 내더라도 실제 기업 입찰에서는 점수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큰 사업자가 계속 이기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적립금 규모와 수익률 순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KB증권은 올해 2분기 주요 증권사 가운데 원리금비보장형 DC와 IRP의 1년 수익률이 각각 60.13%, 52.98%로 최상위권을 기록했고 3년 수익률도 DC 24.47%, IRP 23.33%로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반면 적립금 규모에서는 미래에셋증권 등 기존 선두 사업자와 여전히 상당한 격차가 있다.

    기금형이 이런 기존 경쟁 구도를 어느 정도 흔들지도 관심사다. 기업과 근로자를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적립금을 유치하는 현재의 계약형과 달리 다수 사업장의 자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묶으면 영업 대상이 줄어들고 대규모 자금에 대한 운용 경쟁이 중요해질 수 있다. 기존 영업망과 브랜드보다는 수탁법인 참여 여부, 운용 역량과 비용 등이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증권업계에서는 현재의 퇴직연금 영업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뿐 아니라 전국의 중소 사업장까지 개별적으로 접촉해야 하고 공식 제안요청서(RFP)가 나오기 전부터 기업 담당자를 찾아다니며 관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안 해도 될 경쟁을 지나치게 치열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며 "고객에게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이익과 비교해 영업에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다만 기금형이 도입되더라도 기존 선두 사업자가 반드시 불리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국내에서 이미 운영 중인 대표적인 기금형 제도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의 2기 전담운용기관에는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증권이 재선정됐다. 푸른씨앗은 지난달 말 기준 적립금이 약 1조9000억원까지 성장했고 9월 1일부터 2기 사업에 들어갔다. 기존 계약형에서 쌓은 대규모 연금 운용 경험과 OCIO 역량을 기금형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금융권의 이해관계를 결정할 변수는 기금형이라는 이름보다 세부 설계가 될 전망이다. 수탁법인을 누가 설립할 수 있는지, 금융회사가 단독 또는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할 수 있는지, 기존 계약형과 기금형 사이 자금 이동을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지 등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국민연금공단 등 공공기관의 참여 여부도 최대 변수로 꼽힌다. 국민연금이 직접 경쟁자로 들어올 경우 기존 민간 사업자들이 받을 충격은 사업자 규모와 관계없이 커질 수 있다.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참여를 두고 전문가와 금융업계 내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다른 증권사 연금 담당자는 "기금형이 도입되는 것 자체는 이제 거의 정해졌다고 보고 있다"며 "문제는 어떤 사업자가 어떤 형태로 참여하고 어떤 자금을 기금형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느냐다. 그 내용에 따라 지금 시장을 지키려는 회사와 판을 바꾸려는 회사의 셈법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