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의 25조원 청구서, 왜 삼성전자·하이닉스가 선납해야 하나
입력 2026.09.04 16:00

취재노트
예견된 전력부족·한전 자본고갈 1년간 방치해 놓고선
호남 반도체 숙제까지 얹어주고선 '5년치 선납' 요구
10년 전 시작한 용인 클러스터 전력망도 삐걱대는데
신뢰 불가능한 한전 금융비용을 왜 양사가 지원하나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전력공사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향후 5년치 전기요금 25조원을 먼저 내달라고 제안했다. 명분이 없지 않다. 양사가 반도체 증설 속도전에 나서려면 우선 한전부터 전력망 투자에 앞장서야 한다. 한전이 최대 고객사로부터 선수금을 걷어 전력망에 투자하는 식이라면 양측 모두에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문제는 전력 부족 전망이나 한전 자본력 우려가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인프라업계에서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공급부족 심화와 인공지능(AI) 인프라 수요를 감안해 전력공급 대책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작년 2월 확정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AI로 인한 산업 변화를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발전량을 늘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발전원 구성부터 송전망과 변전설비, 신규 발전소 입지까지 전력 인프라 전반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는 우려가 1년 전부터 제기됐다. 

    뒤집어 말하면 업계는 당시부터 한전 자본력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국내 전력 정책의 큰 틀은 정부가 계획하지만 송·배전 계통은 한전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제 와서 반(反)원전·탈(脫)화석연료 기조를 포기하고 민자를 유치해 발전설비를 늘리더라도 이를 산업 현장까지 연결하려면 송·변전망을 구축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한전의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 한전의 금고는 지난 2022년 사상 최악의 적자 이후 사실상 고갈 상태다. 10년 넘게 전력수요 예측부터 발전·계통 투자, 전기요금 체계가 엇박자를 내면서 재무여력이 심각하게 훼손됐다. 

    지난 6월말 기준 한전 부채는 약 210조원. 현행법상 한전의 사채 발행액은 원칙적으로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를 넘을 수 없다. 당시 국회가 한시적으로 이를 5배로 늘리는 특례를 마련해 겨우 버티고 있다. 이마저도 내년 연말이면 일몰돼 다시 2배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까지 역으로 약 10조원 안팎 한전채 순상환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조달 창구는 사실상 막혀 있고 갚아야 할 돈만 차곡차곡 불어나는 상태로 비유된다. 

    정부 출자를 통해서라도 자본확충을 서두르거나, 아니면 요금 체계라도 차츰 정상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진단도 꾸준히 내려졌지만,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연초 예정된 요금체계 개편은 중동 사태로 호르무즈 해협이 닫히면서 무색한 일이 됐다. 2022년 요금체계 왜곡으로 인한 한전 자본고갈이 정점을 찍고, 이후로 정부가 두 차례나 바뀌었지만 여느 정부 가릴 것 없이 땜질처방만 되풀이하다가 반도체 초호황(슈퍼사이클)과 AI 붐을 동시에 맞닥뜨렸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1년 전부터라도 전력시장 왜곡 문제를 순차적으로 풀고 자본 보강 작업을 수행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정부가 호남 반도체 지원사격하라고 숙제를 더 얹어버렸다"라며 "당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분산특구 지정에서마저 친환경·신재생만 인정하겠다고 몽니를 부리고, 정부는 갑자기 한전 산하 5개 공기업을 통합하라고 주문하면서 제각기 급하지도 않은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전했다. 

    이제 와서 부랴부랴 꺼내든 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5년치 요금을 당겨 받겠다는 발상이다. 주도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권한도 없고, 계통 독점권을 내려놓을 생각도 없으면서 비용 청구서는 슬쩍 민간 상장기업에 떠넘기는 구조로 비유된다. 

    일단 시장에서는 선수금에 적용할 금리 수준을 이번 협상의 핵심 걸림돌로 보고 있다. 현재 거론되는 방안은 한전채보다는 싸게, 국고채보다는 비싸게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한전 입장에서는 선수금을 받지 못하면 한전채 발행 등 다른 방식으로 투자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만큼, 최소한 기존 조달비용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끌어와야 제도의 실익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수년간 수십조원을 한전에 묶어두면서 낮은 수익률을 받아들일 유인이 크지 않다. 향후 시장금리가 올라가면 더 높은 금리로 자금을 운용할 기회까지 포기해야 한다. 양사 증설 전략에 한전 지원이 필수적이라고는 해도, 주주 입장에서는 한전이 싸게 조달하는 기회비용을 양사가 대납하는 구조를 묵인하기 어렵다. 동일 만기 한전채 수익률에 준하는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양사가 공기업 한전에 거액의 저리 신용공여에 나서는 상황으로도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전이 제때 전력망을 깔아서 그만한 사업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이를 수용하고 주주를 설득할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양사에게 당장 이자 50bp(1bp=0.01%)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보다 전력망을 1년이라도 먼저 확보하는 사업적 가치가 훨씬 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전이 뒤늦게 서두르는 정황으로 봐선 이마저도 신뢰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한가득이다. 한전은 정부로부터 2030년 호남에서 반도체 양산이 가능하도록 서두르라고 숙제를 받아든 상태다. 현 시점 2030년 호남 팹(Fab) 양산 가동 계획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이사회에서 확정된 사안도 아니고, 정부가 제시한 정책 목표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부지, 용수, 전력 인프라 확보 가능성을 포함해 정부가 짠 일정의 현실성부터 검증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여전하다. 이 때문에 지역개발 정책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당권 경쟁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양사 자체 투자계획 때문에 필요한 전력망을 선금융으로 해결하는 것과, 정부가 설정한 산업정책의 시간표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양사가 부담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정부가 한전에 낸 숙제를 치르는 데 필요한 비용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왜 부담해야 하나. 10년 전부터 추진해온 용인·청주 등 경기 남부권 반도체 클러스터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실현 여부도 불투명한 목표를 추가하고, 그 투자 재원까지 시가보다 낮은 조건으로 민간기업에 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전력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집행해야 할 정부와 공기업이 선결 과제는 제대로 풀지 못한 채 돈 잘 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손을 벌리는 모양새다. 전력계통에 대한 통제권은 공공이 쥔 채 대규모 투자에 필요한 자본 부담만 자꾸 민간에 넘기는 구조가 반복될 경우 비용과 위험을 왜 민간 상장사가 부담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