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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증권사 채권자본시장(DCM) 부문의 대표적인 큰손은 SK하이닉스였다.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선 SK하이닉스가 조 단위 회사채를 발행할 때마다 SK그룹과 관계가 돈독한 SK증권을 비롯한 대형 증권사들이 돌아가며 거래에 참여해 주관과 인수 물량을 나눠 가졌다. SK하이닉스는 DCM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핵심 발행사로 꼽혔다.
올해 분위기는 정반대다. AI 메모리 호황을 등에 업은 SK하이닉스의 현금창출력이 크게 개선됐다. 굳이 회사채 시장에서 돈을 빌릴 이유가 줄었다. 올해 2분기 말 SK하이닉스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88조원, 순현금만 69조4000억원이다. 실제로 회사는 올해 공모채 시장을 찾지 않을 전망이다.
이는 SK하이닉스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일반기업 공모 회사채는 지난해 12월 이후 올해 8월까지 9개월 연속 순상환을 이어갔다. 올해 8월 기준 누적 순상환액은 17조2000억원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 3조9000억원 순발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회사채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가운데, 은행들은 가계대출 대신 대기업 대출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 등 전략산업 기업에는 생산적 금융과 국민성장펀드 등 정책금융이라는 선택지가 생겼고, 산업은행도 저금리 기업금융을 확대하고 있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변화다.
이런 상황에서 증권사에 귀한 손님으로 떠오른 곳이 롯데그룹이다. 지주부터 건설·화학·호텔·유통까지 계열사들이 돌아가며 조달 시장을 찾고 있다.
상반기 공모 회사채 시장에서만 롯데그룹 발행액은 2조원을 웃돌았다. 롯데쇼핑과 롯데웰푸드, 호텔롯데, 롯데케미칼 등이 잇달아 등장했다. 영구채나 구조화금융 분야까지 더하면 증권사들이 롯데에서 확보할 수 있는 일감은 더 많아진다. 올해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가 회사채와 신종자본증권, 자산유동화증권(ABS) 등을 통해 조달한 중장기 시장성 자금은 공식적으로 4조원에 육박한다.
증권사들의 DCM 실적에서도 롯데의 영향력이 확인된다. 하나증권은 올해 롯데케미칼과 호텔롯데 등 롯데 계열사에서만 1940억원 규모의 대표주관 실적을 확보했다. 올해 6월에는 KB증권과 NH투자증권이 롯데쇼핑과 호텔롯데 회사채 주관에 나란히 참여하며 실적을 쌓았다.
롯데는 과거 롯데건설 유동성 경색 이후 그룹 전반에 재무 우려가 확산했다. 자연히 롯데 계열사 회사채는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인식이 확산했고, 증권사와 투자자들도 관심을 거뒀다. 그러나 올해는 우량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에서 존재감을 줄이면서, 꾸준히 일감이 발생하는 롯데그룹이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다.
롯데가 증권사들의 'VIP'가 된 것은 단순히 발행 금액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계열사들의 자금조달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일반적인 회사채 주관을 넘어 신종자본증권과 신용보강, 유동화 등 다양한 형태의 IB 일감이 함께 발생하고 있다.
롯데건설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는 지난달 500억원 규모 공모 회사채를 발행했다. 1년물 300억원과 1년6개월물 200억원의 소형 거래였지만 KB증권과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키움증권, 삼성증권, 하나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7개 증권사가 공동 주관사로 나섰다. 회사는 CFO가 직접 투자 설명에 나섰는데, 수요는 희망금리밴드 최상단(민평금리 대비 +30bp)에 몰렸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롯데라는 이름과 건설이라는 이름이 합쳐지면 기관들이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측면이 있다"며 "절대금리가 6%대 수준은 돼야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롯데건설은 조달 방식을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올해 상반기 두 차례에 걸쳐 총 6000억원 규모로 공사대금채권 ABS를 발행했다. 준공 이후 받을 공사대금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떼어내고, 금융사의 신용보강을 결합해 롯데건설 자체 신용등급(A급)보다 높은 AAA급 유동화증권으로 구조화했다.
첫 발행이 시장에서 소화되자 두 달 뒤에는 기초자산을 준공 임박 주택사업장뿐 아니라 롯데그룹 계열사 건축사업장의 공사대금채권까지 확대하기도 했다. 증권사에는 회사채 대표주관과 인수 외에 유동화 구조를 설계하고 투자자를 모집하는 새로운 일감이 생겼다.
롯데케미칼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자체 신용만으로 일반 회사채를 발행하는 대신 시중은행 지급보증을 활용해 AAA급 보증채를 만들었다. 지난 4월 4000억원, 7월 2000억원 등 올해만 6000억원을 조달했다.
롯데 계열사들이 올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도 9200억원에 달한다. 롯데건설 3500억원, 호텔롯데 2200억원, 롯데지주 1500억원, 롯데컬처웍스 1000억원, 롯데글로벌로지스와 롯데GRS 각각 500억원 규모다. 일감이 줄어든 증권사들은 롯데 한 그룹에서 DCM과 구조화금융을 아우르는 여러 종류의 거래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다만 롯데가 자본시장의 '큰손'이 된 배경은 다른 기업들과는 정반대다. 롯데케미칼은 장기간의 석유화학 업황 부진 과정에서 누적된 재무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사업재편을 진행해야 한다. 롯데건설 역시 PF 우발채무를 크게 줄였지만 추가적인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호텔롯데도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재무부담을 관리하며 차입구조를 손보고 있다.
올해 롯데 계열사의 조달자금 상당 부분은 공격적인 신규 투자보다 기존 회사채와 CP, 금융권 차입금 상환 등에 쓰이고 있다. 최근 1500억원 회사채를 발행한 롯데지주는 CP 1000억원과 기존 회사채 500억원을 갚을 예정이다. 롯데칠성음료의 2300억원 회사채 조달액 중 2200억원이 채무상환 목적이다. 기존 부채를 갚고 단기차입을 장기물로 바꾸며 신종자본증권으로 자본을 보강하는 디레버리징 과정에서 거래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임원은 "요즘 대기업들은 유동성이 풍부해 회사채를 굳이 찍지 않는다"며 "기업금융 부문에서는 발행할 기업 자체가 귀해졌는데, 롯데는 지주부터 건설·화학·호텔까지 계속 시장을 찾고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