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게시판까지 읽는 글로벌 투자자…'뒷북 밸류업' 안 통한다
입력 2026.09.16 07:00

취재노트
고려아연·골프존, 이사회 밖에서 시작된 주주의 견제
해외 투자자도 AI로 韓 뉴스 댓글까지 읽는 시대인데
'사후약방문'으로 고려아연만큼 버틸 회사 몇이나 될까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난 2년 간 이어져온 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의 경영권 분쟁이 내년 주주총회까지 또 연장전에 돌입했다. 독립감사위원 분리선출에서 고려아연 측이 제안한 후보가 자리를 확보하면서다. 완전한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장은 이번 결과를 최윤범 회장의 판정승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다만 이사회는 애초에 특정 주주나 경영진이 아닌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경영진을 감독·견제하는 기구다. 고려아연이 추천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 인사'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거버넌스 관점에서는 모순인 셈이다.

    MBK파트너스·영풍 측이 제안한 박유경 후보는 주총 현장에서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선관의무와 충실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에는 독립이사가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독립이사가 없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원칙은 고려아연 측이 추천해 선출된 독립감사위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경영권 분쟁의 승패와 별개로, MBK 등장 이전 고려아연 이사회가 전체 주주를 위해 제대로 된 견제·감시 역할을 했는지는 여전히 따져볼 문제다.

    대표적으로 고려아연의 원아시아파트너스 출자 건이 있다. 고려아연은 투자 실적이 전무했던 신생 사모펀드 운용사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누적 약 5600억원을 출자했고, 이 자금 일부는 최윤범 회장 및 일가가 투자한 본업과 무관한 엔터·콘텐츠 기업들(아크미디어, 하이헷, 슬링샷스튜디오 등)에 흘러갔다. MBK측은 이 과정에서 추가 투자와 손실까지 발생했다며 사적 유용 및 배임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고려아연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고려아연이 상당한 산업 경쟁력을 갖춘 회사인 것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비철금속 제련 경쟁력에 미·중 갈등과 공급망 재편으로 핵심광물 분야의 전략적 가치도 커졌다. 최윤범 회장은 한화·LG·현대차그룹 등과 구축해온 전략적 지분 관계를 우군으로 활용했고, 해외에서도 베인캐피탈 등 글로벌 PEF의 투자를 유치했다. MBK 측에서도 "생각보다 너무 얕봤다"는 평가가 나왔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런 고려아연의 '체력'과 별개로, MBK의 문제 제기 이전에도 이사회 독립성 등 거버넌스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회사였는지는 다른 문제다. 오히려 외부의 견제를 거치며 제도를 정비하고 내실을 다져온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사회가 아닌 주주의 견제가 기업의 의사결정을 바꾼 사례도 나온다. 최근 골프존홀딩스 상장폐지 철회가 대표적이다. 회사 측은 경영 효율화와 중복상장 해소를 명분으로 상장폐지를 추진했지만, '헐값 공개매수' 논란과 소액주주 반발 끝에 결국 계획을 철회했다.

    회사 측은 지난 6월과 8월 두 차례 공개매수에서 모두 주당 6700원을 제시했다. 1차 공개매수 이후 주가가 8000원대까지 오르면서 2차에는 단 한 주도 응모하지 않았다. 지분 약 3%를 보유한 미국계 펀드 터톤캐피털은 적정 주가로 3만1100원을 제시하고, 공개매수가 산정 근거를 밝히라며 세 차례 공개서한을 보냈다.

    골프존 측은 이후 '밸류업'을 제시했지만 소액주주들의 의문은 여전하다. 진정한 밸류업 의지가 있었다면 왜 앞서 이를 제시하지 않았는지, 최대주주가 85%의 지분을 보유한 채 상장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건전한지에 대한 지적이다. 공개매수가격 등 기업가치 산정 과정에서 이사회의 정상적인 감독·견제 기능이 작동했는지를 둘러싼 의문도 남아 있다.

    이러한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더 이상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내놓는 '보여주기식 밸류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국내 대표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두 회사가 약 13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책을 내놨지만 해외 투자자들은 "더 많은 현금을 돌려준다는 이유만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특히 시장은 삼성전자가 왜 SK하이닉스처럼 자사주 매입·소각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는지, 현금배당 방식이 금융계열사의 금산법 규제나 그룹 지배구조상 이해관계와 맞물린 것은 아닌지까지 따져들었다. 주주환원책 발표 이후 시장 반응도 엇갈렸다. 얼마를 돌려주느냐를 넘어 그 방식과 배경, 누구에게 유리한 결정인지까지 들여다본다는 얘기다.

    이제 국내 상장사를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보는 것은 국내 투자자뿐만이 아니다. AI 붐과 상반기 코스피 강세를 계기로 글로벌 투자자의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특히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에 한국 시장은 여전히 '노다지'로 통한다. 아직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 펀드들이 한국에 사무소를 내고 있고, 개인이 운용하는 해외 펀드들도 국내 상장사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달라진 점은 이들이 보는 정보의 범위다. AI 번역을 활용해 국내 언론 보도는 물론 포털 주주게시판과 블로그, 뉴스 댓글, 투자 플랫폼 및 SNS까지 훑으며 국내 여론과 투자자들의 요구를 파악한다. 공시와 IR 자료 등 공식 자료 역시 언어의 장벽 없이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됐다. SNS에서 수만명의 팔로워를 가진 해외 유명 개인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거버넌스 문제를 직접 공론화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관심은 대기업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기관이나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중소형 코스닥 상장사까지 '수익성은 좋지만 거버넌스가 취약하다'는 이유로 주주관여(engagement)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회사 자체의 사업적 중요성과 우호적인 지정학적 환경, 오너가의 네트워크까지 맞물리며 장기간의 분쟁을 버텨왔다. 하지만 모든 상장사가 고려아연만큼의 '체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더구나 투자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훨씬 빠르게 들여다보고 있다. 외부의 견제가 시작된 뒤에야 거버넌스를 정비하고 '밸류업 계획'을 내놓는 방식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