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쳐야 산다'는 유럽…20년 만의 M&A 심사 변화에 韓도 주목
입력 2026.09.18 07:00

EU, 기업결합 가이드라인 전면 개편 추진
규모·투자·혁신·글로벌 경쟁력 평가 강화
미·중과 산업경쟁 격화…국내에도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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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유럽연합(EU)이 20여 년 만에 기업결합(M&A) 심사 가이드라인을 전면 개편한다. 미국·중국 기업과의 경쟁에 대응해 M&A를 통한 규모 확대와 투자·혁신, 글로벌 경쟁력 등을 보다 명시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이다. 경쟁제한 우려가 큰 대형 기업결합을 엄격하게 심사해온 EU의 기조 변화가 국내 기업결합 정책에도 시사점을 줄지 주목된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경쟁총국(DG COMP)은 지난 4월 30일 새로운 기업결합 가이드라인 초안을 공개했다. 2004년 제정된 수평적 기업결합 가이드라인과 2008년 제정된 비수평적 기업결합 가이드라인을 통합·개편하는 작업이다. 지난 6월 공개 의견수렴을 마쳤으며 EU 집행위는 올해 4분기 최종 가이드라인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개편에서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규모'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EU 집행위는 새 가이드라인에서 기업들이 M&A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몸집을 키우는 '친경쟁적 대형화'를 명시적으로 다뤘다. 역내 시장에 편익을 가져오고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기업결합의 긍정적 효과를 심사 과정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가격 이외의 경쟁 요소도 폭넓게 들여다본다. 혁신과 투자뿐 아니라 외부 충격에 대응하는 회복력, 지속가능성 등이 주요 평가 요소로 제시됐다. 기업결합으로 상호보완적인 자산과 역량을 결합하거나 시너지를 확보해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투자·혁신 역량을 높이는 효과 등도 평가한다.

    EU 경쟁당국도 최근 이 같은 방향을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 휠런 EU 집행위 경쟁총국장은 이달 8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친경쟁적인 규모 확대를 인정하는 것이 이른바 '유럽 챔피언'을 포함한 대형 기업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취지로 밝혔다.

    EU는 그동안 경쟁제한 우려가 큰 대형 기업결합에 대해서는 엄격한 심사를 해왔다. 국내 기업이 당사자였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에서도 EU는 경쟁제한 가능성을 면밀히 들여다봤다. EU 집행위는 양사의 결합이 유럽경제지역(EEA)과 한국을 연결하는 항공화물과 4개 여객 노선의 경쟁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보고 2023년 심층심사에 착수했다. 

    이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의 글로벌 화물기 사업 매각과 해당 여객 노선에서 경쟁 항공사의 진입을 지원하는 시정조치를 제시하자 2024년 2월 조건부 승인했다.

    조선업에서는 기업결합을 불허한 사례도 있다. EU 집행위는 2022년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불허했다. 양사의 결합으로 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세계 시장에서 지배적 사업자가 탄생해 경쟁이 제한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 경쟁당국이 결합을 승인했지만 EU의 불허 결정 이후 거래는 결국 무산됐다.

  • 이처럼 경쟁제한 가능성을 엄격하게 따져온 EU가 기업결합에 따른 규모 확대와 투자·혁신, 글로벌 경쟁력의 효과를 보다 명시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이번 개편은 주목된다.

    배경에는 유럽 산업의 경쟁력에 대한 위기감이 있다. AI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미국과 중국 기업의 대형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시장이 분절된 유럽 기업들이 규모와 투자 여력에서 밀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대규모 연구개발과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산업에서는 기업의 규모가 장기적인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커졌다.

    다만 이번 개편이 대형 M&A에 대한 일률적인 '규제 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U 기업결합 심사의 기본 목적은 경쟁적인 역내 시장을 유지하는 데 있으며 경쟁제한 효과에 대한 심사 역시 그대로 유지된다. 규모 확대에 따른 효율성도 실제 편익으로 이어지고 해당 기업결합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입증돼야 한다. '유럽 챔피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형 M&A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국내에서도 EU의 변화에 관심이 쏠린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현행 기업결합 심사기준 역시 시장점유율만으로 경쟁제한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해외 경쟁 도입 가능성과 국제적 경쟁 상황 등을 고려하고, 생산·판매·연구개발 등에서 기업결합으로 발생하는 효율성 증대 효과가 경쟁제한에 따른 폐해보다 큰 경우도 인정하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결합 심사에서 규제 완화 또는 강화로 규정할 정도의 뚜렷한 정책 기조가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게 관련 업계의 평가다. 기업결합 심사는 개별 사안별로 공정위가 현행 심사기준에 따라 경쟁제한 가능성과 효율성 등을 검토하는 데다 최근 시장 판도를 바꿀 만한 초대형 기업결합 사례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최근 기업결합 심사 과정에서 과거보다 세부적인 사안까지 면밀하게 살펴보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부 거래의 심사 기간이 길어지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거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EU가 글로벌 산업 경쟁과 규모 확대를 기업결합 심사의 주요 화두로 제시한 점은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평가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EU의 변화는 경쟁제한 심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규모 확대에 따른 투자·혁신과 글로벌 경쟁력 등 긍정적 효과를 보다 명시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라며 "한국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결합을 어떤 시장 범위와 시간축에서 바라볼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