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대신 CP 택하는 기업들…발행 가뭄 속 롯데·한진 약진
입력 2026.09.30 07:00

회사채 큰손 된 롯데그룹 2.9조 발행
한진그룹, 대한항공 중심 조달 확대
은행 대출·단기물로 조달 수요 이동
내년 초 회사채 시장 복귀 여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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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회사채 시장에서 기업들의 조달 전략 변화가 나타났다.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장기 자금을 확보하는 대신 은행 대출이나 기업어음(CP) 등 단기 조달 수단을 택하는 기업이 늘었다. 장기 조달 비용이 커진 데다 금리 불확실성이 이어지자 발행 시점을 늦추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통적으로 채권자본시장(DCM) 부문의 큰손이었던 SK그룹을 제치고 롯데그룹이 가장 큰 조달 규모를 기록했다. 한진그룹도 대한항공의 대규모 발행에 힘입어 발행액을 늘렸다. 회사채 발행이 위축된 시장에서 그룹별 자금 수요와 조달 전략이 차별화하는 모습이다.

    인베스트조선이 집계한 2026년 3분기 DCM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롯데그룹의 회사채 발행 규모는 총 2조8827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1조8210억원) 와 비교했을 때 58.3%가량 증가한 수준으로, 단일 그룹 기준 최대 이슈어로 부상했다. 

    증권사가 주관을 맡은 무보증 공모회사채(일괄신고 제외) 발행 규모는 3분기 누적 기준 70조2310억원에서 40조4277억원으로 줄어들었는데 롯데그룹은 오히려 발행을 늘린 셈이다.

    롯데그룹의 특징은 특정 계열사가 대규모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 여러 계열사가 연이어 회사채 시장을 찾았다는 점이다.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을 비롯해 롯데웰푸드, 롯데리츠, 롯데칠성음료, 롯데지주 등이 발행에 나섰다. 계열사별로 사업과 재무 상황에 따른 자금 수요가 이어지면서 그룹 전체 발행액도 확대됐다.

    이는 증권사들의 DCM 실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나증권은 올해 롯데케미칼과 호텔롯데 등 롯데 계열사에서만 1940억원 규모의 대표주관 실적을 확보했다. 올해 6월에는 KB증권과 NH투자증권이 롯데쇼핑과 호텔롯데 회사채 주관에 나란히 참여하며 실적을 쌓았다.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가 회사채와 신종자본증권, 자산유동화증권(ABS) 등을 통해 조달한 중장기 시장성 조달 규모는 공식적으로 4조원에 육박한다. 우량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에서 존재감을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롯데그룹은 DCM과 구조화금융을 아우르며 꾸준히 일감이 발생해 증권가에서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다.

    한진그룹은 올해 누적 발행액이 1조1740억원까지 늘었다. 지난해 발행액 기준 상위 10개사에 오르지 못했으나, 올해는 7번째로 조달을 많이 한 기업집단으로 집계됐다.

    대한항공의 총 세차례에 걸친 대규모 회사채 발행이 그룹 전체 조달 규모를 끌어올렸다. 롯데가 여러 계열사의 분산된 조달 수요를 바탕으로 발행액을 늘렸다면, 한진은 대한항공의 자금 수요가 두드러졌다는 차이가 있다. 

    항공업계의 통합 관련 비용 등 자금 소요가 조달 규모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항공은 조달 자금을 회사채 차환과 항공기 리스료 상환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항공업 특성상 대규모 현금 유동성을 상시 확보해야 한다는 점도 회사채 발행 배경으로 꼽힌다.

    SK그룹은 이례적으로 존재감이 옅어졌다. 3분기 SK그룹의 회사채 발행액은 총 2조6950억원으로, 전년 동기(8조6700억원)와 비교했을 때 급감했다. SK그룹 내에서 빅이슈어로 꼽히는 SK하이닉스가 올해 공모채 발행에 나서지 않으면서 시장 전반의 발행 규모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LG(2조700억원)와 한화(1조9970억원), CJ(1조4290억원) 등 다른 대기업 그룹들도 시장 변동성과 투자심리 위축 영향 속에 보수적인 조달 기조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키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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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시장 전반에서는 회사채 발행을 미루고 대체 조달 수단을 활용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회사채 발행금리가 은행 대출금리보다 높아지면서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조달 비용이 적은 은행 대출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CP와 단기사채를 통해 우선 자금을 확보하고 장기 회사채 발행은 뒤로 미루는 움직임도 두드러진다.

    은행권의 기업대출 공급 확대에는 금융당국의 생산적 금융 기조도 한몫을 했다. 가계대출 관리 강화에 따른 은행의 자산운용 전략 변화와 더불어 가계, 부동산 부문에 집중된 자금을 기업과 첨단, 전략산업 등 생산적 부문으로 유도하면서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6년 8월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8월 은행 기업대출은 한 달 새 9조7000억원 증가했다. 7월 증가액 7조7000억원보다 2조원 늘었다. 대기업 대출만 4조9000억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회사채는 9000억원 순상환됐다. CP·단기사채는 4조1000억원 순발행을 이어갔다.

    장기 조달 비용이 높아진 상황에서 기업들이 일단 단기 자금을 확보한 뒤 장기금리가 안정되면 회사채 발행에 나서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회사채 시장에서도 신규 발행 중 1~3년물 비중은 확대되고 장기물 비중은 축소되는 등 조달 만기가 짧아지는 흐름이 나타났다.

    한 신용평가사 연구원은 "우량 기업은 회사채 시장 접근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금리와 시장 상황에 따라 은행 대출이나 CP를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서도 "신용도가 낮은 기업은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 데다 은행 대출을 통한 추가 조달까지 제약될 경우 단기 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올해 회사채 발행액에서 AA급 이상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5%까지 확대됐다. 비우량채 시장에서는 미매각 물량도 예년보다 높은 수준을 보였다. 발행 가뭄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업 간 자본시장 접근성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시장에서는 올해 단기 조달로 전환된 자금 수요가 내년 초 회사채 시장으로 다시 유입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단기 조달은 당장의 이자 부담을 낮추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금리 하락이 지연되거나 차환 여건이 악화하면 기업들의 자금 부담이 빠르게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설비투자나 인수합병(M&A) 등 장기간에 걸쳐 자금이 필요한 사업을 단기 차입으로 조달한 기업은 만기 불일치와 반복적인 차환 부담에 노출될 수 있다.

    한 증권사의 크레딧 연구원은 "금리 안정과 기관투자자의 수요 회복이 뒷받침된다면 단기 조달을 활용했던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며 "반대로 장기 조달 여건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단기 차입에 대한 의존이 이어지면서 기업별 차환 부담의 차이도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