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국고채 시장을 지탱해 온 초장기물 중심의 발행 체계가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다. 만기 1년 이하 단기 국고채 도입이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실수요 부재와 제도적 규제가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채권업계에 따르면 국고채 장기물의 버팀목이던 보험사의 매입 여력은 뚜렷하게 꺾인 것으로 분석된다. IFRS17(회계제도) 도입 이후 자산·부채 만기(듀레이션) 일치가 상당 부분 마무리되면서, 주요 생명보험사의 자산 만기가 부채 만기분을 넘어섰다. 이 경우, 금리 상승 시 자본비율 악화 우려로 보험사의 추가 매수 유인은 줄어든다.
실제로 30년물 발행 비중은 지난해 31.5%에서 올해(1~8월) 24%로 급감했다. 이어 10년물과의 금리 역전 해소 후 스프레드가 30bp 이상 벌어지는 등 수급 불안이 심화되면서, 향후 30년물 발행 축소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에 더해 연간 국고채 이자 상환액이 30조 원을 넘어서며 총지출의 4% 이상을 차지하는 등, 장기채 중심 조달에 따른 정부의 재정 부담이 가중된 점도 만기 구조 재편을 자극하는 요인이다.
-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주요 선진국은 일찌감치 단기물 확대로 활로를 찾았다는 평가다.
미국은 MMF(머니마켓펀드) 수요를 흡수해 1년 이하 단기 국채 비중을 22.8%(8월 말 기준)까지 늘렸다. 이를 통해 국가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유동성이 떨어진 기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바이백) 유동성 관리 수단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 영국도 단기·변동금리부 채권 비중을 늘리는 추세다.
반면 한국은 OECD 주요국 중 1년 이하 국고채를 정례 발행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단기자금 시장의 대기 유동성을 국채 수요로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그간 단기 국고채가 발행되지 않았던 배경으로는 한국은행 통화안정증권(통안채)과의 역할 분담이 꼽힌다. 시중 유동성을 흡수·조절하는 통안채가 단기 시장을 전담하고, 기획재정부의 국고채는 중장기 조달에 집중하는 이원화 구조가 유지돼 왔다는 분석이다.
다만, 학계에서는 두 채권 간 영역 중복에 따른 마찰 요인이 이미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평가한다. 과거와 달리 국고채 2년물과 통안채 3년물 도입으로 영역이 겹친 데다 통안채 잔액도 줄고 있어서다. 아울러 30년물 축소분이 2·3년물로만 쏠릴 경우 중단기 지표금리가 급등할 수 있어, 1년 이하 단기채가 커브 전반의 수급 충격을 완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실수요자인 자산운용업계의 평가는 회의적이다. 한 운용사 MMF 운용역은 "국채 유동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듀레이션 제약이 큰 MMF 특성상 1년 만기 구조는 부담스럽다"며 "수익률 경쟁을 벌이는 일반·신종 MMF 입장에서 금리가 비교적 낮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은 단기 국고채를 담기 위해 기존 크레딧물을 줄일 이유는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증권사 채권 데스크 역시 수급 왜곡을 우려한다. 단기 국고채 정례 발행 시 국채전문딜러(PD)들이 의무 인수 물량을 떠안아 시장에 덤핑 매각할 가능성이 높고, 금리 경쟁력이 떨어지면 외국인 재정거래에만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30년물 감축분이 1년 이하 발행으로 전환되면 단기 시장의 절대적 공급이 불어나, 한전채·LH(한국토지주택공사)채 등 AAA급 초우량 공사채·특수채 매수 자금을 흡수하며 초우량물 시장 전반의 금리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업계 관측이다.
단기채의 연속적인 발행과 유통을 가로막고 있는 현행 법체계도 시장 조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국가재정법상 국채 발행 한도는 회계연도 기준 '발행 총액'으로 관리된다. 만기 3개월 단위의 단기채 1조 원을 1년 동안 4회 '차환 발행(롤오버)'할 경우, 실질적인 부채 잔액은 1조 원이지만 장부상 발행 총액은 4조 원으로 산정돼 국회 승인 한도를 조기 소진하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발행 한도 산정 기준을 '발행 잔액' 또는 '연간 순증액'으로 전환하는 법 개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시장이 필요로 하는 초단기 라인업 구성과 정부의 바이백·국채 교환 등 유통시장 조성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 분석이다.
시장 안팎에서는 단기 국고채 도입이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 법령 개정과 수요자 중심의 정교한 설계가 선행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정화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단기 국고채 도입은 단기물 중심 시장 체제로의 전면적 전환이 아니라, 만기 다변화를 통해 시장 상황에 맞게 발행 전략을 탄력적으로 운용하자는 취지"라며 "정부 조달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특정 만기 구간으로의 수급 쏠림을 완화해 채권시장 전반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