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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거액 예금 만기가 다가오면서 시중은행들의 자금 조달 부담이 커지고 있다. 대기업 예금 만기가 다가오면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에 하락 압력이 커져 은행들이 실제 유동성 사정과 별개로 선제 조달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은행채 투자 수요 약화와 시장금리 상승까지 겹치면서 이 같은 조달이 비용 부담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모습이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오는 4분기 대기업 정기예금 만기를 앞두고 은행채 등을 통한 선제적인 자금 조달에 나서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5일까지 4대 시중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9월 은행채 발행액은 10조4000억원으로 전월 5조6400억원보다 약 84.4% 증가했다.
대기업들은 통상 10~11월을 중심으로 예금 만기를 맞추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올해는 반도체 업황 호조로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늘면서 은행권에 들어온 자금 규모도 과거보다 커진 것으로 파악된다. 은행권에서는 올해 하반기 대기업 예금 만기 규모가 예년보다 큰 편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기업의 자금 규모는 일반 대기업과도 차이가 있다. 일반 대기업 역시 조 단위 자금을 운용하지만 현금성 자산이 많은 반도체 기업은 은행권에서 움직이는 자금 규모와 빈도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대기업 자금이 주거래은행 뿐만 아니라 여러 은행에 분산돼 있긴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기가 돌아오면 은행권 전반의 유동성 지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개인예금은 열심히 유치해도 1조~2조원을 늘리기가 쉽지 않은 반면 대기업 자금은 한 번에 3조~5조원씩 움직이기도 한다"며 "일반 대기업보다 반도체 기업의 현금 자산 규모가 큰 만큼 은행 입장에서는 민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은행 수신잔액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안정적인 조달기반이 그만큼 확대됐다는 의미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인을 중심으로 한 소매성 예금보다 일부 대기업 자금 유입이 전체 수신 증가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최근 수신 증가분을 볼 때 개인 예금이 크게 늘었다기보다는 일부 기업 자금이 상당 부분 들어온 영향이 있는 것 같다"며 "소매성 예금이 크게 늘어난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자금이 실제로 빠져나갈지 결정되기 전부터 은행들이 조달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은행들이 예금 만기보다 한발 앞서 조달하는 것은 LCR 산정 방식 때문이다. LCR은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현금유출액에 대비해 은행이 충분한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거액 기업예금의 만기가 30일 이내로 들어오면 실제 재예치 여부와 관계없이 상당 부분이 현금 유출로 반영된다. 특정 대기업의 거액 예금 만기가 한꺼번에 돌아올 경우 실제 유동성 상황과 별개로 지표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이러자 만기가 도래하기 전부터 선제적으로 조달에 나서야 한다는 설명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한 달 이내로 만기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LCR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며 "실제로 롤오버가 되는지 여부와 별개로 유출로 잡히기 때문에 만기 금액이 크면 어느 정도 미리 조달해 메워놓아야 하는 이슈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예금은 개인예금보다 LCR 산정 과정에서도 유출 가능성이 높게 반영된다. 개인예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반면 기관·기업 자금은 한 번에 큰 금액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기업들이 대차대조표상 현금을 확보하려는 경향도 있어 예상 유출률 역시 상대적으로 높게 적용된다.
은행 입장에서는 실제 유동성 부족과 LCR 하락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대출 수요나 실제 자금 사정에 큰 문제가 없더라도 거액 예금 만기가 일정 시점에 몰리면 산식상 LCR이 빠르게 떨어질 수 있어서다. 특히 11~12월에는 연초보다 대출 만기 등 현금 유입으로 잡히는 항목이 상대적으로 적어 현금 유출과 유입 사이의 미스매칭도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같이 조달이 필요한 시점에 채권시장 여건까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은행들이 예금으로 채우기 어려운 자금을 금융채로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발행 여건이 나빠지면서 조달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다. 국채금리가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은행채 수급도 좋지 않다. 은행들이 비슷한 시기에 발행에 나서는 반면 이를 받아줄 투자수요는 충분하지 않아 발행금리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권 다른 한 관계자는 "공교롭게 수급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금리까지 올랐다"며 "수급이 좋지 않더라도 시장금리가 어느 정도 받쳐줬다면 금리가 지금처럼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를 더 얹어 발행해도 시장금리가 다시 오르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금리 메리트가 빠르게 사라진다. 은행이 원하는 규모를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계속되면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이 관계자는 "사는 곳이 없으면 금리를 더 줘야 원하는 금액이 들어오는데, 그것도 계속되면 한계가 있다"며 "국채금리가 하루 이틀 사이 빠르게 오르면 높은 금리를 얹어 발행해도 투자자가 얻는 메리트가 금방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의 발행 부담은 4분기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통상 4분기는 은행채 만기가 상대적으로 많은 데다 올해도 10~11월 추가 발행 필요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에서는 9월이 발행 부담의 정점일 가능성도 보고 있지만, 올해 조달 수요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다만 10월 이후에는 채권 수급이 일부 개선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상반기 은행채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SK하이닉스가 최근 직접 투자를 줄인 상태지만, 시장에서는 향후 자산운용사를 통한 채권 집행을 재개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은행권 다른 한 관계자는 "최근에는 하이닉스 자금이 예전처럼 직접 들어오지는 않고 있지만 10월부터 운용사를 통해 집행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어 수급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걸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달비용 상승은 은행들의 수익성 관리에도 부담이다. 통상 시장금리가 오르면 대출금리도 함께 상승해 순이자마진(NIM)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최근에는 조달금리 상승분을 대출금리에 그대로 반영하기 쉽지 않다.
가계대출은 관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고 기업대출에서도 은행 간 금리 경쟁이 치열하다. 은행채와 예금 등 조달금리가 먼저 오르는 상황에서 대출금리가 같은 폭으로 따라가지 못할 경우 단기적으로 NIM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원래는 조달금리가 올라가면 대출금리도 같이 올라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지금은 대출금리가 위로 가기가 쉽지 않고 조달금리는 오르는 상황"이라며 "조달금리 상승분을 대출금리에 모두 반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자 은행권에서는 최근의 거액 기업예금 만기를 계기로 LCR 산정 방식이 실제 유동성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나온다. 실제 유동성이 부족하지 않은 은행도 이를 맞추기 위해 선제적으로 시장성 조달에 나서야 하고, 최근처럼 채권시장 여건이 좋지 않을 경우 규제비율 관리가 곧바로 높은 조달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최근 조달 과정에서의 부담은 실제 유동성 부족이라기보다 LCR 비율을 맞추는 문제에 가깝다"며 "은행의 유동성은 충분히 나쁘지 않은데 비율이 확 떨어지다 보니 수치상으로는 유동성이 상당히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