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펌·IB 구인난 불렀던 VC 호황은 끝…고액 연봉 인력은 낙동강 오리알?
입력 24.04.25 07:00
2020년초 벤처 호황으로 폭풍 성장한 VC들
한은ㆍ증권사ㆍ회계펌 '인력 블랙홀'은 옛말
IRR 저하에 성과보수 줄고 AUM도 하락세
높은 몸값 자랑했던 고액 연봉 인재들은 부담
  • 2020년 초반 돈과 인력을 빨아들이며 '인재 블랙홀'로 불렸던 벤처캐피탈(VC) 업계가 인건비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유니콘 멸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타트업 업계가 침체에 빠지자, 각 업계에서 높은 몸값을 불러 인력들을 충원했던 VC들은 인건비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신규 투자도 어려운 상황이라, 수백억원 대의 '성과급 잔치'도 끝났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2020년 초에는 '큰 돈을 만지려면 VC로 가야한다'는 말이 정설이었다." -VC업계 관계자

    2020년대 제2의 벤처붐이 일어나면서, 창업 몇 년 만에 1조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기록하는 유니콘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토스(비바리퍼블리카)ㆍ컬리(마켓컬리)ㆍ두나무ㆍ여기어때 등이 선전하면서, 2000년 초 제1차 벤처붐 당시의 3배를 웃도는 벤처기업들이 생겨났다. 

    이에 국내 VC업계도 몇 년간 '제2의 전성기'를 누려왔다.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스타트업을 점찍었던 정부가 VC 펀드에 대한 출자 규모를 늘렸고, VC들의 운용자산(AUM)도 불어났다. 벤처캐피털(VC)의 신규 투자 금액은 2020년 말 기준 7조7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유동성이 쏠리면서 투자를 기다리는 대기자금(약정금액)도 33조원에 달했다. 

    돈을 쏠 곳도 많았고, 돈을 주겠다는 곳도 많았다. AUM의 증가로 VC들의 관리보수도 증가하면서 역대급 실적이 이어졌다. 돈이 많으니 벤처업계에 몸 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증권사 유명 애널리스트, 제약회사 연구원, 대학교수, 재활병원 원장, 변리사, 회계사 등등 각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사람들은 고액 연봉을 꿈꾸고 VC행을 택했다. 특히 2021년 금융업계 '신의 직장'으로 꼽히는 한국은행 조사역이 SBI인베스트먼트를 택한 것은 큰 화제가 됐다. 

    업황 자체의 호황으로 VC업계 진입 장벽도 낮아졌다. 새롭게 VC를 설립하거나, 대기업들이 VC를 설립하는(CVC) 경우도 많아졌다. 신생 VC들이 인재 영입을 위해 연봉인상 카드를 꺼내들자, 기존 VC들이 인력 이탈을 막기 위해 무리한 연봉 인상 요구를 따르는 일도 빈번했다. VC들의 주 러브콜 대상이었던 주니어급 회계사의 연봉이 1억원에 육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몇 년 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2022년 1분기 이후 본격화된 금리 인상을 기점으로 비상장회사들의 기업가치가 급락했다. 기업공개(IPO) 시장도 한산해졌고, 인수합병(M&A) 거래도 쉽지 않아 VC들이 자본을 회수하기 어려워졌다. 투자금 회수가 되질 않으니 투자자(LP)들이 신규 투자도 불허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살림에, 드라이파우더가 쌓여도 쓸 수가 없어졌다. 

    "3월마다 있는 운용보고회가 두렵다. LP들 앞에서 투자자산을 결국 상각했다는 말을 해야하는데,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다." –국내 대형 VC 심사역

    성공 신화를 꿈꾸고 VC업계에 찾아온 심사역들도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통상 심사역들은 비상장사 투자에 회사와 개인 자금을 태우는 GP 커밋(운용사 출자금)을 통해 운용보수와 성과보수 외에도 수익을 노릴 수 있다. 

    다만 2022년 이후로 IPO 시장이 어두워졌고, 팬데믹 유동성 장세에서 유니콘 이상으로 몸값을 키웠던 기업들은 ‘거품’ 비판에 직면하면서 기업가치가 투자 시점보다 줄어들었다. VC업계에선 "성과급은 바라지도 않는다. 패널티나 면하면 다행"이라는 말이 나왔다. 

    최근 펀드 운용역들 사이에선 GP 커밋 확대를 요구하는 LP를 두고 원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GP 커밋을 위한 사내 대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대형 VC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GP 커밋은 심사역들이 퇴직연금 확정기여형(DC)의 수십배가 넘는 수익을 낼 기회처럼 여겨졌다"며 "최근 실적 나쁜 펀드들이 많아지자, 대출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높은 몸값을 주고 모셔온 인력들은 회사의 부담이 됐다. 추가 투자할 곳은 줄어들고, 자금 모집(펀딩)도 난항을 겪은 VC들은 이제 '안살림'에 집중하고 있다. 결산을 단축하고, 법카 오용 등을 정리하고, ERP(전사적자원관리) 등 비용 최소화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억대 연봉을 지불해야 하니 분위기도 나빠졌다. VC 대표들 사이에선 '급여로 나가는 돈이 더 많다'며 불만도 커졌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이직해 온 사람들이 화려한 네트워크로 IPO와 투자 유치를 노렸지만 상황이 나빠지자 입지가 좁아진 상황"이라며 "눈높이는 높은데 펀딩은 힘들고 기여도 애매하니 투자업계에서도 심사역의 인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한 VC 심사역은 "VC 주가가 상장 시점 대비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다는 게 시장의 시선을 반영한다는 것"이라며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등 일부 대형 VC들만 돈을 벌어 성과급을 뿌리고, 나머지는 관리에만 집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