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의 역습…갈팡질팡하는 국내 대기업들
입력 2019.12.19 07:00|수정 2019.12.20 08:57
    ESG에 돈대는 기관들…소외 기업은 주가·실적 '악순환'
    국내 기업 대응책, 여전히 '김장', '연탄 나누기' 수준
    지배구조 이슈만 관심…환경ㆍ사회부문 속수무책
    도화선은 '국민연금', ESG로 '기업 길들이기' 우려도
    • "착한 기업에 투자하면 돈을 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의 화두가 된 문장이다. 지속가능한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이른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대세가 됐다. 그동안 양적 성장에만 집착해 환경보호, 사회공헌, 지역사회 및 협력업체와의 관계, 도덕성 등 비재무적 요소를 간과한 기업들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실정이다.

      시류에 편승해 국내 기업들도 예년에 비해 사회적 가치나 친환경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 눈높이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경영권 사수가 최대 과제인 국내 재벌기업들은 지배구조 개선에 치우쳐 있는 게 현실이다.

    • 수익률 우수한 'ESG 투자'…소외 기업은 악순환 불가피

      과거 ESG에 대한 강조가 '당위성'의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수익성'의 문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ESG에 관심을 쏟는 기업들의 실적과 수익성이 높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해외에서는 ESG ETF가 성과를 내면서 다양한 상품이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는 10여개에 달하는 ESG 지수를 개발했는데 벤치마크지수를 보면 'MSCI 전세계지수(MSCI World Index)'보다 'MSCI 사회책임투자 선진국지수(MSCI ACWI SRI)'가 더 높다.

      KB증권에 따르면 ESG 평가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는 기업들은 높은 영업이익률을 보이고, 그 결과 자기자본이익률(ROE) 및 총자산이익률(ROA)과 같은 수익성 지표도 비교군 대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글로벌 ESG 투자 자산 규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4년 이후 연평균 14% 늘어나면서 지난해 말 기준 30조달러 시장으로 성장했다. 야후파이낸스 등에서는 기업별 ESG 퍼포먼스 지표를 공개하는 등 ESG 평가가 재무제표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투자 척도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다. 투자수익률이 올라가고, 이에 관련 투자금 유입도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거꾸로 ESG 이슈에 대비를 못한 기업들은 평판도 및 주가 하락이 예상된다. 당장 기관자금이 이탈하면서 자본시장에서 행보가 줄어들게 된다. ESG 요소 반영의 확대로 상장(IPO)이나 회사채 발행에 미칠 파급 효과도 거론되고 있다.

      ESG에 대한 대비 미흡으로 성장 돌파구인 해외사업에서 차질도 빚어진다. 환경 규제 강화에 따른 '탈(脫)디젤·석탄' 가속화, 유럽과 아시아 사이 운송시간을 단축하는 북극해 항로 운항 중지 선언 등이 사례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인도네시아 파푸아에서 팜유 농장을 운영하면서 열대림을 파괴하자 네덜란드공적연금(ABP) 투자를 철회한 것,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Moody's)가 ESG 위험 요인을 반영해 KCC의 신용등급을 Baa3에서 Ba1으로 하향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증권사 관계자는 "ESG 성과가 좋은 기업은 자본시장에서도 호평가를 받으면서 자본 조달 비용이 낮아지는 효과를 보인다"며 "기업들이 ESG 역량을 강화하면 밸류에이션(Valuation)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투자 유치에 꽤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국내 대기업, '지배구조(G)'는 관심…환경(E)ㆍ사회(S)는 젬병

      ESG를 염려하는 글로벌 상황이 발빠르게 전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국내 대기업들의 대응은 '미봉책' 수준이다. 일단 ESG 인식 자체가 '반쪽짜리'에 가깝고 구체적인 대응 방안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투자업계의 지적이다.

      그나마 국내 대기업이 관심을 쏟는 부분은 G, 즉 '지배구조 이슈'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상위권 대기업 상당수의 3세 혹은 4세 경영권 승계가 한창이다. 아울러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한진그룹에 대해 엘리엇매니지먼트, KCGI 등 국내외 행동주의펀드들이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하거나 경영권 다툼에 뛰어든 이력이 있다. 그만큼 '뜨거운 맛'을 봤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배구조에 대한 민감도나 대응력은 상당부분 개선이 된 상황.

      반면 환경(E)과 사회(S) 부문 개선엔 소홀하다. 그나마 겨울철 '김장', '연탄'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외국계은행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과 금융기관은 지배구조에 관심이 쏠려있지만 선진국 투자자들은 환경 이슈와 인권 문제를 장기적으로 기업의 수익이나 사업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으로 판단한다"며 "기업 이미지 개선을 위해 임직원들이 때마다 쓰레기를 줍고 김장이나 연탄을 전달하는 보여주기 식의 사회공헌 활동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나마 일부 대기업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매년 보강하는 수준이지만 글로벌 기업들의 분석 및 고려 수준에 비해 미흡한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 그나마 신경을 쓴다는 기업조차 장기적인 관점이 아닌, ESG와 연관있는 활동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친다.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앞으로 발생할 리스크를 관리하고 이슈가 확산되기 전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데이터센터 냉각에 쓰이는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나틱 프로젝트(Project Natick)'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 애플은 재생에너지 사용뿐만 아니라 여성 고용자 비율 공개 및 양성 임금 평등 정책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는 자동차 회사 최초로 지속가능한 천연 고무를 타이어에 사용한다.

      문제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난 국내 대기업들이 환경과 사회 부문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 더 큰 리스크를 질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환경관련 이슈가 발생했을 때 자유로울 국내 기업은 없을 정도라는 얘기도 나온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 요소를 문제 삼을 경우 그러잖아도 외국인 투자자가 떠나는 한국시장에 대한 '디스카운트' 요인이 더 불거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도화선은 국민연금…문제는 '정치 편향성' 우려

      국내에서 ESG 요인이 부각될 시초는 결국 '국민연금'으로 예상된다. 세계 최대 규모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은 이미 ESG 투자비중을 앞으로 늘리고 내년부터 투자대상 기업들의 ESG평가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나서면 사학연금, 우정사업본부, 공무원연금, 교직원공제회 등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절차를 밟는 연기금들도 동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움직임은 해외에서도 비슷했다. 앞서 일본에서도 2015년부터 공적연금(GPIF)이 사회적 책임 투자를 중시하고 ESG 상장지수펀드(ETF)를 투자 대상 자산으로 적극 편입하자 많은 기업이 ESG에 전향적인 자세로 빠르게 돌아섰다. GPIF는 159조엔에 달하는 모든 투자에 ESG 통합전략을 도입, 새로운 지수를 개발하거나 기존 지수를 이용해 ESG 투자에 활용하고 있다. ESG 관련 지수를 추종하는 자금은 3조5000억엔까지 늘어났다.

      문제는 국민연금으로 시작될 ESG 평가의 '정치 편향성' 또는 '의도성' 우려다.

      국민연금은 2015년 ESG 평가지표를 마련 후 매년 투자 대상 기업을 6개 등급으로 평가하고 있다. 산업별 특성과 기업 재무성과와의 연계성 등을 고려해 52개 세부지표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지배구조(G)에 보다 집중해 온 경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당국과 국민연금의 기조를 고려해 ▲배당성향 ▲사익편취(일감 몰아주기) ▲지분구조 등 주로 지배구조에 국한된 주주권 행사를 했다. 블랙록(BlackRock)과 뱅가드(Vanguard) 등 글로벌 운용사들이 이사회 및 임직원의 성별과 인종의 다양성까지 따지면서 ESG를 복합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앞으로 투자의사 결정과정에서 환경, 사회 관련 지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겠다는 게 국민연금의 복안이다. 하지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은 아직 마련되지 않아 언제든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즉 정부의, 혹은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대기업 혹은 오너일가 그룹에 대한 '압박'의 창구로서 국민연금이 활용되고, 이에 대한 기준으로서 ESG가 악용되는 상황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시장에선 재벌 해체, 기업 손봐주기 용도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를 활용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연금의 기조가 바뀔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문제"라며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국민연금은 ESG 투자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