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진 탄소중립에 '발등에 불' 떨어진 기업들...사업 전환·조달 다각화 분주
입력 2021.11.01 07:00
    정부의 탄소감축 '장밋빛 전망'에 부담 높아져
    철강·자동차·시멘트·정유·반도체 등 '비상'
    기업별 준비는 차별화…"조달 방법 다각화 필요"
    • (출처=탄소중립위원회) 이미지 크게보기
      (출처=탄소중립위원회)

      정부가 '빠르고 센' 탄소 중립 목표를 제시하면서 산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에너지 업계를 비롯해 철강·자동차·시멘트·정유·반도체 등 제조업체도 탄소 감축을 위해 기존 공정 자체를 바꿔야 할 상황에 놓였다. 친환경 경영 전환을 위한 기업들의 대규모 자금 조달 필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녹색 자금' 조달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18일 탄소중립위원회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18년 대비 기존 26.3%에서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순배출량 0'(탄소중립; 넷제로)을 달성하겠단 목표를 확정했다. 25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단기간에 가파른 속도로 감축해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라며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하며 에너지구조를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 대응이 지금 세계가 공동으로 풀어야 할 핵심 과제인 점을 감안하면 2050년의 탄소중립은 피할 수 없는 목표다. 다만 당장 2030년의 40% 감축 목표는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평가다.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산업계 목소리도 이해한다”며 “기업 혼자 어려움을 부담하지 않도록 정부가 정책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정부가 목표치를 제시한 이상 기업들은 발맞춰야 할 압박이 생긴 셈이다.

      크레딧 업계도 정책과 기업 동향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탄소중립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 지가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할 수 있다. 단순히 친환경 전환 수준이 아니라, 일부는 사업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하는 '대수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확정된 탄소중립 계획이 당장 구체적으로 기업의 신용도나 재무 상태에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향후 규제 강화 등 리스크가 부각될 수 있는 부분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빨라진 탄소중립 타이머에 기업들도 긴장하고 있다. 산업·기업·그룹별 상황은 다르지만 일부 기업들은 탄소중립이 '발등의 불'이다. 탄소배출이 많은 산업군은 대통령 소속 협의체인 탄소중립위원회에 대표로 소속돼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현재 탄소중립위원회에는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자동차), 추형욱 SK E&S 대표이사(정유), 최정우 포스코 회장(철강), 이현준 쌍용양회공업 사장(시멘트), 문동준 금호피앤비화학 사장(석유화학) 등이 참여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도 준비가 덜 됐다는 평이다. 2030년 정부의 전기차 누적 보급 목표치가 기존 385만대에서 450만대로 높아졌지만 국내 자동차 업계의 전기차 보급 능력은 목표치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쌍용차가 2030년까지 최대 보급할 수 있는 전기차는 300만대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집계된다. 부품사들도 전기차 전환 준비가 더딘 상황이다.

      철강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철강업계의 온실가스 감축 수단으로 정부가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제시했지만 포스코의 기술 개발 목표 시점이 2040년이다. 성공적으로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도 기존 고로 9기를 수소환원제철 기술로 바꾸려면 대략 40조원의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포스코는 추산하고 있다. 3기 고로를 보유한 현대제철까지 합치면 총 68조원가량의 자금이 소요될 전망이다.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넷제로'를 위해선 사업을 영위하면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원인을 모두 제거해야하는데, 생산·유통·물류·판매 모든 단계가 포함된다. 체계적인 감축 계획 수립이 필수지만 중소기업들은 내부에서 현황 파악조차 되지 않은 곳들이 다수다. 중소기업은 단일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친환경 전환을 위해 단기적으로 생산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면 수익성이 떨어지다보니 결국 기업의 생존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도 목표달성이 상당히 버거워 고민이 많은데, 일부 기업들은 아직도 자체적인 문제의식도 부족해 올해 들어서 대책을 마련하는 수준이라 아직도 많은 기업들이 뭘 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한 ESG업계 관계자는 “목표달성을 하려면 상당한 투자와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약속한 점들이 있어 정책을 완화할 가능성은 낮다”며 “노력에 비해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면 안되니 일부 방안들은 조절하고, 자금 조달 대안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기업은 발빠른 목표를 내놓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4일 열린 SK그룹 '2021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SK그룹이 2030년 기준으로 탄소 배출량은 2억톤 줄이는 데 기여하겠다는 목표치를 제시했다. 이는 세계 탄소 배출량의 감축 목표치(210톤)에서 약 1%에 해당한다. 또 SK그룹은 전기자동차 배터리와 수소에너지 등에 100조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SK가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룹차원의 사업 전환과 탄소중립의 방향이 맞물리면서다. SK가 석유화학을 주력으로 사업을 영위했고, 해당 산업이 탄소중립의 가장 주적이다보니 사업 전환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비슷하게 탄소배출을 해도 포스코(철강)는 제철 공법 자체가 탄소배출이 많다보니 스스로 저감용 투자가 막대하게 들어가는 부담이 있고, SK 같은 곳은 그룹 자체가 수소와 배터리 등 미래 먹거리 자체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기술투자라 투자자 입장에서 보는 부담도 차이가 있다”며 “결국은 친환경 전환을 어떻게 기업 미래 전략과 연결지어 홍보를 할지, 보유한 기술력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탄소중립 관련 기업들의 자금 조달 이슈도 부상할 것으로 관측된다. 생산 설비 교체부터 사업 전환까지 '돈 들어갈' 영역이 산적해 있다. 

      친환경 전환과 관련해 이미 국내 채권 시장에선 대기업 위주로 ESG채권 조달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ESG채권은 반드시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인증을 받고 발행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산업군이 애매한 기업들은 프로젝트를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한국형 녹색금융 분류체계(K-택소노미)가 연말 제정되면 녹색채권의 기준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ESG채권은 사전 인증뿐 아니라 사후 검토까지 들어가 회사 내부의 지속가능한 관리체계도 필수다. 아직은 친환경 경영 방향이 내부적으로도 명확이 수립되지 않은 기업들이 많아 관리 체계 수립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설명이다.

      대안으로 최근 크레딧 시장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지속가능연계채권(SLB, Sustainability Linked Bond)이다. SLB는 발행에 앞서 ESG 관련 목적을 설정하고 달성 여부에 따라 금리 등 구조적 특징이 달라지는 채권으로, 프로젝트가 반드시 설정되는 현재 ESG채권과 차이점이 있다. 한국신용평가가 올 8월 가장 먼저 지속가능연계채권 평가방법론을 발표했고 이달 한국기업평가와 NICE신용평가가 이어 발표하면서 신평3사 모두가 인증범위를 넓혔다. 

      남은 문턱은 정부의 허가다. SLB를 SRI채권(사회책임투자채권, ESG채권)으로 인정해야 기업들의 발행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 현재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SLB 관련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허가 가능성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최근에 기업들도 SLB채권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정부에서 SRI채권으로 인정을 해 주면 투자자들도 ESG 투자 실적 차원에서 SLB채권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며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기후 금융'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국내도 지금의 높은 녹색 기준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기업들의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