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옥죄기 공약 현실화 초읽기…재계 "새 정부 초기부터 찍힐라"
입력 25.06.05 07:00
민주당 핵심 공약, 상법·자본시장법 개정
이사 충실의무 확대, 집중투표제 등 확실시
M&A, 지배구조 개편에도 일반주주에 초점
  • 이재명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새 정부가 출범한다. 반년 이상 지속한 정치 리스크가 해소되며 침체에 빠진 경기가 다소 회복할 것이란 장미빛 전망도 있지만, 사실 재계엔 이 같은 기대감보단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이 감지된다.

    재계를 향한 대통령의 공약들이 언제 그리고 어디까지 현실화할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새 정부가 강력하게 주장해 온 '주주들의 권익 보장'을 앞세운 주요 공약들이 현실화 할 가능성이 커졌단 점에서 주요 기업들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 가운데 재계가 가장 주목하는 분야는 역시 '상법 개정안'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통한 코스피 5000시대 실현’을 목표로 내건 공약 중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일반주주 권익보호에 초점을 맞춘 공약은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명문화 ▲독립이사를 일정비율 이상 선임하도록 의무화 ▲대규모 상장회사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집퉁투표제 도입 ▲전자투표제 의무화 및 권고적 주주제안 도입 ▲소수의 지분으로 지배력을 확대하는 경제력 집중 해소 등으로 구체화 돼 있다.

    상법개정안은 이재명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부터 당론으로 추진해온 과제이고 선거 당시 핵심 공약 중 하나이기 때문에 향후 입법에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추진한 상법 개정안은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했으나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의요구권 행사로 한 차례 무산된 바 있다. 정권이 바뀐 현재, 재계에선 사실상 개정안 도입이 확실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반주주들의 주주총회 접근성을 높이겠단 취지의 전자투표제 도입은 비교적 이견의 여지가 많지 않다는 평가다. 다수의 상장회사들이 도입했고 아직 정관을 손보지 않은 기업들이 당장 내년 정기주총 시즌에 맞춰 준비한다하더라도 기술적으론 큰 어려움이 없다는 평가다.

    집중투표제 도입과 감사위원 분리선출 공약은 재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내용이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은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사외이사가 아닌, 독립적인 지위를 갖춘 감사를 별도로 선임함으로써 대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감시·감독 기능을 강화하겠단 취지의 제도이다. 기업의 오너 또는 대주주 입장에선 입김이 닿지 않는 독립 감사인이 껄끄러운 존재인 게 사실이다. 실제로 외부 자본의 경영에 대한 간섭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수차례 제기되며 연초 추진된 상법 개정안엔 포함되지 못했다.

    현재 감사위원 분리 선출하는 기업들은 3%룰, 즉 집중투표제를 이용해야 한다. 대주주의 지분율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의결권을 최대 3%까지만 허용하는 게 집중투표제의 주요 내용이다. 고려아연 경영경권 분쟁 사례에서도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해 이사회에 진입을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집중투표제의 실효성을 어떤 측면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나뉘기도 한다.

    민주당은 기업의 집중투표제 도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해 왔다. 기업의 정관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배제할 수 없도록 규정을 정비하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를 통해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명문화하는 내용도 현실화가 유력하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넓히겠단 차원의 내용으로 이미 올해 초 추진했던 상법개정안에 포함됐었다. 재계에선 이사들의 경영활동이 크게 위축할 수 있단 우려를 끊임 없이 내비쳐왔는데,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만큼 개정안에 포함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국내 한 상장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도입 등이 강제할 것을 전제로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며 "이미 스터디를 마치고 향후 계획을 수립한 기업들도 있겠지만 다수의 기업들은 이제부터 새 정부의 기조에 맞춰 부랴부랴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상장회사들의 M&A와 지배구조 개편의 움직임 역시 위축될 수 있단 평가도 나온다. 이는 대부분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자본시장법)의 개정을 통해 추진될 내용에 따른 것이다.

    민주당은 ▲상장기업의 인수·합병가액을 결정할 때 공정가액을 고려해 공정가액을 적용하도록 하는 공약을 비롯해 ▲물적분할 후 자회사 상장시 일반주주에 신주물량 재정 제도화 ▲기업 인수시 의무공개매수 도입 ▲합병 검사인 제도(상장법인과 계열사의 합병시 일반주주가 검사인 선임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제도화) ▲자사주 원칙적 소각 ▲총수 일가 사익편취 점검 강화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같은 자본시장법의 개정에 대비해 주요 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서둘러 거버넌스를 정비하는 움직임을 나타내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빗썸, 두나무 등은 최근 기업 분할을 추진했고 두산그룹은 지난해 말 로보틱스와 밥캣의 합병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분할의 방식(인적분할 또는 물적분할)과 목적이 다르지만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의 과정에서 외부의 변수를 최소화하겠단 의도로 풀이되기도 했다.

    자사주의 소각을 의무화하는 제도 도입은 일반주주들 입장에선 반길만하다. 자사주 소각은 주주 환원전략의 대표적인 방식이지만 기업 입장에선 자사주를 보유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오너의 경영권 지분이 상대적으로 열위한 기업들은 자사주를 활용해 우군을 확보하는 전략을 쓸 수 없게 된다.

    새정부가 상법 개정안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얼마나 속도감 있게 밀어붙일지는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다. 이와 별개로 새정부가 본격적으로 기업들의 밸류업을 요구하기 전 미리미리 주주환원책을 준비하고 사전에 실행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배당 확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를 부양하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상장회사 한 임원급 관계자는 "새로운 정부에서 기업 밸류업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것이 확실해보이는데 기업 입장에선 어떤 방안이 됐든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며 "중소·중견, 대기업을 막론하고 기업들의 상당수가 새 정부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나름의 전략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