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롯데? SK?…정부 지지 끌어낼 석유화학 구조조정안 누가 짜내게 될까
입력 25.06.19 07:00
국제정세 불안에 유가 오락가락…또 산으로 가는 업황 전망
닫을 곳 보여도 나서자니 정무 부담 크고…통폐합 동상이몽
화학도 정유도 총대 메긴 부담…결국 합의점 찾는 게 관건
정부·産銀 채비 신호 기다리는 기업들…맞춤 설계안 누가 낼까
  • LG와 롯데, SK, 한화, HD현대그룹까지 석유화학 사업을 보유한 기업들이 구조조정 시나리오를 짜 맞춰보고 있다. 조정 작업을 주도해야 할 새 정부나 국회, 국책은행도 스터디가 한창이다.  

    민관 공동으로 내수 경기가 엉망인 때에 연착륙을 성공시키면서 지역 반발이나 불공정 시비도 피해 가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의지만으로 부담을 상쇄하기 쉽지 않고 정책 여력도 한계가 있다. 기업들 중 누가 먼저 정부를 움직일 만한 제안을 마련하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6월 들어 석유화학 업황은 재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원료비 부담이 줄어드나 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에 이어 중동에서도 이스라엘과 이란이 충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시진핑 주석의 실각설까지 불거진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와중 구조조정에 돌입해야 하니 민관 가리지 않고 고심이 큰 분위기다. 

    그러나 국내 석유화학 산업에 '슬로우 데스(천천히 죽음)' 진단이 내려진 지도 수년째, 구조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 이미 업계 내부의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 내다 팔 시장도 경쟁력도 사라진 범용 납사분해시설(NCC)부터 줄이는 것이다. 이미 울산, 여수, 대산 등 3대 산업단지에 집적된 NCC를 기반으로 여러 조정 방안이 테이블에 오르내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대산석화단지 내 NCC 통폐합을 놓고 협상에 들어갔지만 쉽지 않은 기류가 전해진다. 대산공장은 롯데케미칼이 2009년 대산유화를 합병하며 일으킨 국내 최초 100만톤 규모 NCC다. 2014년 양사 합작으로 출범한 HD현대케미칼이 통합 운영 주체로 거론되는데, 사업 구조는 물론 감가상각 진행도나 지분 구성이 서로 다르다. 통합 이후 지배구조는 물론 각 공장의 계약 자산부터 수급선, 공급처까지 조율해야 하는데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 쉽겠냐는 얘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산단 내에서 공장끼리 가깝고 NCC부터 다운스트림까지 공정 연계가 된다 해도 자산마다 감가 진행도가 다른데 이걸 통합하면 누군가는 장부상 충격을 받아야 한다"라며 "더군다나 HD현대그룹은 정유 사업 부산물인 납사를 내부에서 해소하려고 NCC에 직접 진출했는데, 규모가 커지면 수직계열화 완결성이 깨진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너무 많다"라고 설명했다. 

    화학사나 정유사 모두 NCC 통폐합이 절실하다는 총론에서 만나 각론에서 입장이 갈리는 전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에쓰오일 역시 울산단지 내 SK지오센트릭 NCC와의 통합 여부를 검토했지만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작년부터 LG화학도 실무진 차원에서 각사와 통합 가능성을 따져봤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면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시나리오가 오고 가고 있지만 좀처럼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은 형국으로 풀이된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국내 화학사 전반 재무 사정도 열악하고 외부에서 공정하게 자산을 평가한다 해도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업계 내에서 정유사들은 국내 기초유분 공급과잉을 만들어 낸 주범으로도 통하는데, 신증설 프로젝트가 아직 가동 중이라 마찬가지로 총대 메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자꾸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NCC 외 아직은 수익성을 갖춘 다운스트림 공정이나 국내외 자본이 투입된 스페셜티 JV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다. 전략적 합작 기한이 만료돼 지배구조를 재정리해야 하거나 당장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에도 제안이 가고 있으나 전방 경기가 불확실해 몸값을 저울질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중동계 국영기업 특유의 고자세나 강도 높은 비밀유지계약(NDA) 등도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나 국회 차원에서도 국책은행을 동원해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0%대 성장률이 기정사실이 된 만큼 새 정부도 임계점에 놓인 석유화학 구조조정을 최대 과제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미 3대 산단 중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자산을 정리해야 할지 윤곽도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수출 제조업 중 다섯 번째 규모에 수십년 동안 지역 고용과 민생 경기를 책임져 온 석유화학 산업을 손 대자니 부담이 적지 않을 거란 평이다. 

    시장 한 관계자는 "내년에는 지방 선거가 예정돼 있다. 구조조정으로 특정 지역의 근로소득 원천이 달아나면 정무적 부담이 커진다"라며 "지난 정부에서 계속해서 미뤄진 구조조정 작업을 연착륙으로 이끌 만한 확실한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부담을 낮춰줄 조력자로 산업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분석도 많다. 실제로 산업은행 내부적으로도 국내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파악 작업이 진행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각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손실을 보완할 방법이나 세제 감면 등 제도적 뒷받침 외에도 저리에 유동성을 공급해 장부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채비를 갖추는 동안 기업들이 민간 차원에서 맞춤형 방안을 마련하는 게 관건으로 꼽힌다. 새 정부가 국정 과제로 상법 개정 등 기업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는 정책도 펼치고 있는 만큼 과거처럼 정부 주도로 거칠게 교통정리에 나서기도 어렵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방안을 짜낸다면 정무적 부담도 줄일 수 있다. 

    증권사 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구조조정이 윈윈으로 끝나지 않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특혜 시비나 투자자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라며 "최종적으로 산업은행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각 기업 차원에서 고용 유지나 신사업 투자 등 보완책까지 마련해서 조정 방안을 짜 놔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