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변화 요구받는 KIC…국내 출자시장 ‘빅플레이어’로 부상
입력 25.11.12 07:00
국부펀드 본연의 기능 재정립
해외 중심 운용모델에서
국내 전략투자형으로 전환 예고
  • 한국투자공사(KIC)가 설립 20주년을 앞두고 ‘역할 재정립’의 요구를 강하게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운용사에 위탁해 글로벌 자산에 투자하는 간접운용 구조를 유지해 왔지만, 정치권과 정부 안팎에서는 “국부펀드가 국내 전략산업과 혁신기업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최근 국정감사에서도 관련 질의가 이어지며, 법 개정 논의까지 공론화되는 분위기다.

    이러한 가운데 KIC는 설립 이후 처음으로 국내 사모펀드(PEF) 를 대상으로 한 대체투자 출자사업에 나서며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올해 국민연금이 출자시장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KIC가 사실상 ‘최대 출자자(LP)’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는 이번 출자를 계기로 KIC가 국내 자본시장 내 ‘큰손’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1일 투자업계에 따르면 KIC는 국내 PEF를 대상으로 하는 첫 출자사업에서 서류심사를 통과한 운용사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PT)을 진행했다.

    대상 운용사는 ▲도미누스인베스트먼트 ▲어펄마캐피탈 ▲IMM인베스트먼트 ▲IMM프라이빗에쿼티  등이다.

    최종 선정된 운용사에는 펀드당 약 2억 달러(한화 약 3000억원)가 출자될 전망이다. KIC는 이 자금을 국내 PEF를 통해 ‘국내 기업과 공동으로 해외 투자’ 하는 데 활용하도록 조건을 달았다. 단순 국내투자 제한 규정을 유지하면서도 ‘국내 자본을 활용한 해외진출’이라는 새로운 운용 모델을 실험하는 셈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안도걸 의원이 KIC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KIC의 총 위탁운용 자산은 745억8000만 달러(약 107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국내 운용사에 위탁된 자산은 11억6000만 달러(약 1.6%) 에 불과하다.

    연도별 비중은 ▲2020년 1.0% ▲2021년 0.8% ▲2022년 1.1% ▲2023년 1.0% ▲2024년 1.3% ▲2025년(8월 기준) 1.6%로, 점진적 증가세에도 절대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다.

    운용사 수 기준으로도 해외 운용사 197곳, 국내 운용사 7곳으로 3.4% 수준에 그친다.

    국내 운용사들은 대부분 주식·채권 등 전통자산을 맡고 있다. 사모주식(PE)·인프라·부동산·사모대출 등 핵심 대체투자 영역에서는 국내 위탁 사례가 전무하다.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획재정부가 국내 기업 해외진출 지원을 위해 50억달러(약 7조원)를 KIC에 위탁했지만, 10년이 넘도록 한 건도 집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부펀드의 존재 이유가 국내 경제의 전략적 이익 확충에 있는 만큼, 투자 결정과 집행의 구조적 병목을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KIC는 법적으로 외화표시 자산에만 투자하도록 규정돼 있어 직접 국내 기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구조가 한계로 거론된다. 법 개정이 병행되어야 전략산업 및 혁신기업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KIC가 싱가포르의 테마섹(Temasek)이나 대만 국가발전기금(NDF)처럼 자국 혁신기업의 해외 확장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마섹은 자회사 버텍스벤처스(Vertex Ventures)를 통해 초기 스타트업 투자까지 확장했고, NDF는 타이와니아캐피털(Taiwania Capital) 을 설립해 첨단 반도체·AI 스타트업을 직접 지원한다.

    반면 KIC는 여전히 해외 기관의 위탁형 운용에 집중하고 있어, ‘정책적 국부펀드’로서의 기능은 미비하다는 지적이다.

    박일영 KIC 사장도 “전 세계 국부펀드가 전략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인식하고 있다”며 “국내 기관이 해외에 투자할 때 KIC가 전략적 파트너로서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PEF업계에서는 KIC의 첫 출자를 ‘시장 판도 전환점’으로 본다.

    국민연금이 운용사당 1000억~1500억원 수준을 출자한 데 비해, KIC는 이번에 운용사당 약 3000억원 규모의 출자 를 계획하고 있어 단일 기관 기준으로는 최대급 규모다.

    특히 KIC의 출자 실적은 해외 LP(유한책임투자자) 유치 경쟁력에도 직결될 것으로 보인다.

    KIC는 운용인력 상당부분이 해외 출신으로, 영어 기반 운용 능력과 국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UAE 무바달라(Mubadala) 등 해외 국부펀드로부터 인력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KIC의 출자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해외 투자자에게 신뢰 신호로 작용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한 PEF 운용사 대표는 “KIC의 출자는 국내 PEF와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며 “국부펀드로서 KIC의 체질 변화가 한국 투자 생태계 전반에 새로운 신호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