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300조 시대의 그림자 '좀비 ETF'...심사 시스템 정비 필요성 부각
입력 25.12.15 07:00
'300조 시대' 앞두고…순자산 100억 미만 ETF만 145개, '좀비 ETF' 급증
혁신 상품은 지연, 카피캣은 빠른 승인…'익숙함 중심' 구조에 질적 저하
"선례 의존 심사·눈치보기에 상품 개발 고착…질적 성장 위해 재정비 필요"
  •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300조원 시대' 초입에 들어섰다. 상장 종목 수도 1100개에 육박하며 외형만 보면 전성기에 가깝다. 

    그러나 팽창 속도와 달리 시장 내부에서는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좀비 ETF'가 빠르게 불어나고, 일부 전략형 ETF는 상장 심사 과정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당국이 '투자자 보호'를 최우선 원칙으로 내세우며 심사 기조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영향이 적지 않다는 평가다.

    9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ETF 순자산총액(AUM)은 291조6058억원, 상장 종목 수는 1053개다. 이 가운데 순자산 100억원 미만 ETF가 145개, 50억원 미만 초소형 ETF만 35개에 달한다. 사실상 시장 관심권 밖에 있는 상품이 전체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다. 

    올해 상장폐지된 ETF는 11개월 만에 47개로, 지난해(51개)에 근접했다. 현행 자본시장법과 거래소 규정에 따르면 상장 후 1년이 지난 ETF의 순자산이 50억원 미만일 경우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며, 반기 말까지 회복하지 못하면 상장폐지가 확정된다.

    좀비 ETF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차별성 없는 '미투(카피캣) 상품'의 난립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올해 상반기 조선·방산·원전 등 '조·방·원' 등 일부 테마 ETF가 흥행하자, 여러 운용사가 거의 동일한 구조의 ETF를 일제히 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국내 운용업계는 각 하우스 고유 운용철학보다는 '시장 유행을 얼마나 빨리 따라가느냐'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며 "선도적 전략보다는 검증된 테마를 뒤따르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차별성 없는 부실 ETF도 그만큼 늘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다만 업계 책임론만으로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최근 늘어난 좀비 ETF 상당수는 혁신 상품에 대한 심사 자체가 선례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투자자 보호 장치가 마련된 구조임에도,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심사가 지연되거나 보완 요구가 과도하게 반복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국내 운용사는 변동성 완화와 하방 위험 관리 기능을 강화한 새로운 형태의 전략형 ETF를 추진했으나, 심사 과정에서 선례 부족을 이유로 구조 설명과 보완 절차가 장기간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상품은 상장 후 변동성이 낮고 성과도 안정적으로 나타났지만, 유사 설계의 후속 상품은 끝내 심사 단계에서 진전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운용사 한 관계자는 "위험이 크지 않더라도 구조가 생소하면 심사가 길어지고, 반대로 구조는 단순하지만 기초자산 변동성이 높은 테마 ETF는 선례가 많다는 이유로 승인 속도가 더 빠른 경우가 있다"며 "결국 심사가 '익숙함 중심'으로 작동해 혁신 시도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는 구조가 된다"고 말했다.

    선례가 많은 기존 구조·테마형 ETF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승인되는 흐름인 반면, 새로운 구조·기법이 적용된 ETF는 잠재 위험 요인을 이유로 심사가 길어지는 게 근본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풍토가 자리잡으며 혁신보다는 '안전하고 익숙한 구조' 중심으로 상품 공급이 쏠리는 결과를 낳았고, 카피캣 상품이 늘면서 시장의 질적 저하가 심화됐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국거래소는 보수적 심사 기조 지적에 대해 일정 부분 선을 긋는다. 거래소 한 관계자는 "운용사마다 심사를 어렵게 느끼는 정도가 다를 수 있으나, 규정·시행령·세칙에 따라 처리할 뿐"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인적 자원의 부족을 보수적 심사의 배경으로 꼽기도 한다. ETF 심사를 담당하는 당국 상장팀은 약 5명 규모로 연간 160건 안팎의 신규 상장 심사를 처리하는데, 이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준이다.

    운용업계에서는 결국 ETF 심사 체계를 재검토해야 시장의 질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핵심은 심사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 구조의 '위험 특성'을 정확히 구분해 기준을 차등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데 업계도 동의하지만,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구조가 안정적인 상품까지 심사가 지연되는 것은 개선이 필요하다"며 "위험 기준에 따라 심사 강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시장의 질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