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쏘아올린 공…'국내 영업' 기업들, 미국 상장 부담 커지나
입력 25.12.24 07:00
국세청에 특검까지 쿠팡 향한 전방위 압박
'미국 기업' 내세워 '책임회피' 원인 지적
영업은 한국에서, 책임은 미국에서? 혼선
해외상장 거론된 기업들, 부담 고조될 듯
  • 쿠팡 사태를 계기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실질적인 영업이 이뤄지는 기업의 미국 상장 추진이 이전보다 쉽지 않은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상장 기업’이라는 점을 앞세운 쿠팡의 대응이 정치권과 당국의 반발을 키웠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향후 국내 기업들의 해외 상장 전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국세청은 쿠팡 한국 법인의 물류 계열사인 쿠팡풀필먼트서비스(CFS)에 대해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본사인 쿠팡Inc와 한국계 미국인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탈세 의혹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쿠팡 전반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특별검사팀은 23일 서울 송파구 쿠팡풀필먼트서비스(CFS) 사무실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퇴직 금품 지급과 관련한 자료를 확보하는 등 압수수색에 나서기도 했다.

    대규모 ‘정보 유출’에서 시작된 이른바 ‘쿠팡 사태’가 이처럼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으로 이어진 배경에는, 쿠팡이 ‘미국 상장 기업’이라는 점을 앞세워 책임을 회피해 왔다는 인식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쿠팡은 사태가 확산되자 박대준 국내 법인 대표를 사실상 경질하고, 쿠팡Inc의 해럴드 로저스 최고관리책임자(CAO)를 임시 대표로 선임했다. 지난 17일 국회 청문회에 참석한 로저스 임시 대표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준법·리스크 관리 전문가로, 청문회 과정에서 ‘한국어를 모른다’는 취지의 답변을 반복했다.

    정치권에서는 특별 청문회 개최 등을 검토하며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출석을 요구했으나, 김 의장은 “전 세계 170여 개국에서 영업하는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 공식적인 비즈니스 일정이 있다”는 내용의 불출석 사유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같은 쿠팡 측의 대응에는 지주회사가 ‘미국 상장 기업’이라는 논리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영업 수익이 한국에서 발생하는 해외 상장 기업의 경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향후 국내 기업의 해외 상장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이 이전보다 한층 엄격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자문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안이 정치권과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 배경에는 쿠팡이 거둔 영업이익의 상당 부분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음에도, 지주회사가 미국에 상장돼 있다는 점을 내세워 ‘미국 기업’임을 강조해온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며 “이런 분위기에서는 당분간 국내에서 실질적으로 영업을 하는 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를 이유로 미국 상장을 추진하는 것이 당국으로부터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토스(비바리퍼블리카), 두나무(네이버파이낸셜 합병 예정), 야놀자, 네이버웹툰, 컬리, 직방 등 주요 플랫폼·테크 기업들이 한때 미국 증시 상장을 검토하거나 추진하는 것으로 거론된 바 있다. 쿠팡의 뉴욕증시 상장 이후 성장 기업을 중심으로 더 높은 기업가치와 글로벌 투자자 접근성을 이유로 나스닥 등 미국 상장이 대안으로 언급돼 왔다.

    특히 핀테크와 플랫폼, AI·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상장 요건이나 밸류에이션 한계를 우회하기 위한 선택지로 미국 상장이 거론됐지만, 상당수는 시장 환경과 규제 여건 등을 이유로 검토 단계에 머물렀거나 전략을 재조정한 상태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실질적인 영업 기반을 둔 기업의 해외 상장을 바라보는 당국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어, 미국 상장을 둘러싼 판단이 이전보다 복잡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 상장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기업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투자자 풀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긍정적인 요인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점은 가장 큰 리스크로 꼽힌다. 쿠팡 사례는 미국에 상장할 경우 오히려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는 평가다. 실제로 쿠팡은 미국 현지에서도 집단소송에 직면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현재 국회나 정부 차원에서 기업들의 해외 상장 추진 자체를 제도적으로 제한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쿠팡 사례를 계기로 해외 상장 기업의 책임 소재 문제가 부각되면서, 여당을 중심으로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 등 감독당국과의 비공식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근 금융당국이 자본시장 관련 제도 정비 과정에서 여당과 물밑 논의를 거쳐 정책을 발표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향후 공식적인 논의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국회 관계자는 “쿠팡이 국회나 정부의 자료 제출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배경에는, ‘미국에 상장한 기업인 만큼 책임 역시 미국에서 져야 한다’는 인식이 회사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한국에서 영업을 통해 수익을 내면서도 상장은 미국에서 한 구조에서, 실제 영업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 소재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모호해진다는 점을 이번 사안을 통해 분명히 드러냈다”고 말했다.

    현행 제도상 국내에서 영업하는 기업의 해외 상장을 제도적으로 제한하는 명확한 규정은 없다. 다만 외환거래 규제, 공시 의무, 주주 보호 등 여러 규제 영역과 맞물려 있어 당국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외 상장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컨대 토스(비바리퍼블리카)의 경우 법적으로 금융당국의 사전 승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비상장 상태에서도 이미 금융당국의 상시 감독 대상에 해당한다. 미국 상장을 추진하려면 해외 지주회사 설립, 지분 구조 재편, 주식 교환 등의 절차가 수반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주주 적격성, 지배구조 안정성, 경영권 변동 가능성 등 주요 사안이 모두 국내 금융당국의 심사 및 문제 제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 증권사 IPO 담당자는 “국내 기업의 해외 상장은 상장 과정 전반이 여러 규제와 맞물려 있어 사실상 당국의 기조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며 “특히 금융업의 경우 비상장 상태에서도 금융당국의 상시 감독 대상인 만큼, 미국 상장을 추진하더라도 대부분의 사안이 금융당국의 심사·검사 대상이 돼 당국의 스탠스와 무관하게 해외 상장을 추진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