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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 시즌이 막바지다. 올해의 화두는 단연 '거버넌스 선진화'라는 거대한 물결이다.
삼성과 SK에 이어 LG그룹 구광모 회장도 지주사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취임 8년만의 결단이다. 구 회장은 이제 의장석 대신 현장 CEO의 역할을 택했다. 재벌 총수가 스스로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 경영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행보는 외견상으론 완벽한 '글로벌 스탠다드'다.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이 커다란 물결이 된 건 틀림없지만 '거버넌스 워싱(Governance Washing)'이라는 꼬리표를 떼기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경영 최상위단의 판단력이 절실한 시점인데, 운동장엔 플레이어보단 휘슬을 불 심판만 가득한 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 사외이사의 면면은 여전히 금융 관료, 법조인, 교수 일색이다. 물론 이들은 오너 경영인 또는 CEO가 법을 어기는지, 돈을 허투루 쓰는지 감시하는 '심판'으로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한 글로벌 기술 전쟁터에서, 감독(CEO)과 함께 전술을 짜고 공격을 지시할 전문성을 갖췄는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한국을 사실상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란히 금융위원장 출신의 사외이사 의장을 앉힌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신제윤 삼성전자 의장은 국제금융 전문가, 고승범 SK하이닉스 의장은 통화 금융 정책 전문가라는 각각의 특징은 있지만 결국 정부 및 금융권과의 소통, 규제 대응이라는 '수비적 경영'에 특화돼 있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선봉에 서야 할 이사회가 '대관(對官)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사외이사 의장이 외견상으로는 오너 경영인 또는 CEO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독립성을 갖춰서 견제하기는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2026년 초, 애플은 75세가 된 이사회 의장 아서 레빈슨(Arthur Levinson)을 유임시키기 위해 연령 제한 규정까지 손질했다. 제넨텍 CEO 출신인 그는 단순한 감시자가 아닌, 팀 쿡 CEO 뒤에서 기술과 경영의 접점을 조율하는 '수석 코치' 역할을 맡고 있다. 실적 부진에 빠졌던 스타벅스는 이사회 의장 멜로디 홉슨(Melody Hobson)의 주도로 '치폴레의 영웅' 브라이언 니콜을 CEO로 직접 영입했다. 아서 레븐슨이나 멜로디 홉슨에게 의장석은 퇴임 후 예우나 방패막이가 아닌, 경영진과 함께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미래를 고민하는 '진짜' 플레이어라 할만하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이사회 분리 압박에도 불구하고 의장과 CEO를 겸임하면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거버넌스 점수보다 압도적 혁신과 속도를 내세워 주주들을 설득했다. 주주들은 이들이 사익 편취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또는 주가를 압도적으로 올린다는 전제 하에 이 독주를 용인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업체 대만 TSMC도 웨이저자 CEO가 2024년부터 이사회 의장(회장)을 겸직하고 있다. 글로벌 AI붐에 빠른 판단과 결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물론 한국적 특수성은 있다. 냉정히 말해 국내엔 대기업 의장석에 앉을 만한 '은퇴한 거물 경영인' 인력풀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 경쟁사 출신을 영입하기엔 폐쇄적인 기업 문화가 발목을 잡고, 섣부른 영입은 또 다른 유착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결국 상대적으로 인력풀이 넓은 관료나 교수가 '안전한 선택지'가 되는 구조적 한계다.
이제 4대 그룹 중에선 오너 경영인으로서 이사회 의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이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유일하다. LG가 그랬으니 이제 현대차에도 사외이사 의장이 출현하는 것 아니냐는 압박은 이미 시작됐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미래차 전환이라는 큰 변화를 맞고 있는 현대차의 상황을 감안하면 사외이사 의장만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 다양한 선택이 유효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누가 기업의 이사회 의장을 맡을 지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사외이사 의장을 두고선 누군가는 '투명한 전진', 또 누군가는 '투명한 정지'라는 정반대로 얘기할 수 있다. 오너 의장을 두고서도 마찬가지다. '책임있는 전진'을 얘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버넌스 선진화'라는 명분이 기업의 엔진에 모래를 뿌리는 격이 돼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와 기업들은 말 그대로 백척간두 (百尺竿頭) 상황이다. 이사회 멤버와 의장으로선 경영진의 대척점에 선 심판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줄 베테랑 코치도 절실하다. 이름값이 아닌, 실력값을 계산할 때다.
입력 2026.03.26 07:00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6년 03월 25일 11:00 게재
Invest Column
사외이사 의장 전성시대
여전히 금융관료·장관·교수 정도
거버넌스 '워싱' 우려는 여전
해외선 CEO 출신 의장이 직접 조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