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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이 퇴직연금 의무화 논의에 속도를 내면서 수백조 원 규모의 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금융권의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결국 실속은 증권사가 챙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기존 거래 관계를 앞세운 은행들이 초기에는 확정급여(DB)형 자금을 흡수할 수 있겠지만, 시장의 무게추가 '수익률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특성상 증권사의 우위를 꺾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최근 퇴직연금 의무화 적용을 받지 않고 있는 중소기업 사업장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유치를 포함한 종합 금융거래 영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퇴직연금 단계적 의무화 이후 시장에 쏟아질 막대한 자금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현재 퇴직연금제도는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과 신규 사업장에 도입이 의무화되어 있다. 정부는 2027년 100인 이상 사업장까지 의무화를 확대하고, 향후 2028년에는 5~99인 사업장, 2030년에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전면 적용하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오는 2040년 예상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현행 제도 유지 시 1172조원이지만, 의무화가 전면 시행될 경우 최소 1216조원에서 최대 1708조원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의무화로 인해 2040년까지 최대 530조원 이상의 자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추가로 유입되는 셈이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의 주도권은 은행이 쥐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권의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은 52.0%로, 증권사(26.2%)와 보험사(26.2%)보다 높다. 기업대출 등 기존 여수신 금융거래를 바탕으로 기업의 퇴직연금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는 구조적 이점 덕분이다. 실제로 최근 신한은행은 지난 1분기 잔액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 54조7391억원을 기록하며, 전통의 강자였던 삼성생명을 제치고 금융권 전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은행들의 고민은 깊다. 최근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도입과 글로벌 증시 호황이 맞물리면서, 가입자들의 직접투자 수요가 급증해 증권사로의 자금 이탈(머니무브)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퇴직연금 의무화를 기회로 삼아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은행 적립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DB형을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하거나, 이직·퇴직 시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갈아타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의무화 적용을 받는 신규 사업장의 DB형 자금을 초기에 대거 확보해 놓아야 장기적인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는 셈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기존에 거래해 왔던 기업고객들 중 퇴직연금 의무 가입자가 아닌 분들을 대상으로 영업에 힘을 싣고 있다"라며 "퇴직연금 의무화가 은행에게 또다른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의무화가 추진되더라도 은행들의 판정승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도입 초기에는 익숙한 주거래 은행의 DB형으로 기업 자금이 쏠릴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과 근로자들이 수익률 제고를 위해 DC형으로 제도를 전환할 유인이 커져 결국 증권사로 자금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정부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는 이미 DB형을 도입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 적립금운용위원회 설치 및 적립금운용계획서(IPS) 도입을 의무화한 데 이어, 최소적립비율에 대한 사후 제재 규정을 신설하는 등 기업들이 퇴직연금 수익률을 제고해야만 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은행권은 ETF 등 거래 종목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은행만의 강점인 '안정성'을 무기로 차별화에 나서고 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수익률을 제공하면서도 변동성을 최소화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보수적인 투자층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최근 같은 주식 강세장 환경에서 단순히 수익률 지표만 놓고 비교한다면 증권사로 자금을 이전하는 게 매력적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복잡한 제도나 운용 방식에 대해 전문적인 설명과 대면 관리가 필요한 기업 및 가입자들에게는 증권사와 비교해 전국적인 지점망과 풍부한 네트워크를 가진 은행이 확실한 강점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시장의 무게추가 결국 수익률에서 우위를 점한 증권사로 기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DC형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증권사 선호 현상은 물론, 은행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기업의 DB형 적립금마저 수익률 제고 압박에 따라 증권사 DC형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그동안 대출 등 기존 거래 관계를 묶어 둔 DB형 퇴직연금은 은행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왔다"면서도 "하지만 향후 DB 적립금에도 수익률 제고 압력이 거세질 것을 고려하면 초기에 은행으로 유입됐던 기업 자금마저 결국엔 증권사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정부가 퇴직연금 의무화와 함께 추진 중인 퇴직연금 기금화가 각 업권에 미칠 영향에도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사들은 민간 금융회사가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하는 '금융기관 개방형'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은행·증권·금융지주 등 설립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진행 중이란 설명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이나 보험, 증권 등 업권별로 이해관계가 각각 다르다 보니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에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내부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라며 "만약 금융지주가 설립 주체가 된다면 가장 비중이 큰 은행이 주도권을 잡게 될텐데, 운용 주체가 누가 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고 덧붙였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노사정 TF에서 논의 중인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등은 어디까지나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한 차원"이라며 "시장에는 기존의 '계약형'과 신설될 '기금형' 제도가 함께 공존하며 가입자가 본인의 성향에 맞게 선택하는 영역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입력 2026.06.10 07:00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6년 06월 04일 07:0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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