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분쟁 '프레임 싸움' 격화…"경영상 필요" vs. "미국에 퍼주기"
입력 25.12.19 07:00
고려아연, 美 정부와 전략적 파트너십
美 참여 JV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증자
회사 "성장 전략" vs. 연합 "주권 포기"
가처분 결과에 따라 분쟁 판도 달라져
양측 모두 승리 자신하며 여론전 분주
  • 고려아연이 미국 현지에 제련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후 회사와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의 명분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 회사 측은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손을 잡았다는 당위성을 설파하는 반편, 연합 쪽에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중요 사업을 내준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지난 15일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미국 테네시주에 제련소 건설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사업 규모가 10조원(66억달러)에 이르는 대형 프로젝트다. 회사와 미국 정부 등이 설립한 합작법인(JV)을 대상으로 약 20억달러 규모 증자를 진행하고, 미국 현지에서 보조금과 차입금도 조달하기로 했다.

    이에 앞선 지난 12일, 고려아연은 이사회를 대상으로 이같은 안건을 올릴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렸고 주말 사이 설명회를 진행했는데 영풍 연합 측의 반발이 거셌다. 발표 당일 이사회서도 난상 토론이 이어졌다. 연합 측은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아연 주권’을 포기하려 한다고 비판했고, 16일엔 법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초반 주도권은 고려아연이 선점한 모습이다. 한국과 미국 간 '경제 안보 협력'이라는 큰 명분을 제시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발표 당일 주가도 반등했다. 반대로 영풍 연합 측은 '이사회 당일 현장에서 제한적으로 해당 사실을 접했다'고 언급할 만큼 대응할 시간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현재 이사회는 최윤범 회장 11명 대 연합 4명 구도다. 이 중 6명의 임기가 만료되는데 연합 측 지분율이 높고 집중투표제도 도입됐기 때문에 4석 정도를 연합이 가져갈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연합 측이 자금력을 앞세워 지분을 계속 인수하고 있었고, 그 다음 해에도 이사진이 대거 퇴임하기 때문에 경영권 확보는 시간 문제란 시각이 많았다.

    이번 계획으로 최윤범 회장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JV가 최 회장의 우군이 되면 연합 측과 지분율 격차는 거의 사라진다. 새 이사를 3명씩 나눠서 뽑으면 이사회는 최 회장 측 9명 대 연합 6명 구도가 된다. 이후 미국 사업 성과가 본격화한다면 연합 측의 입지가 더 위축될 수 있다.

    현시점 경영권 분쟁의 키는 법원이 잡고 있다. 가처분이 인용되면 연말 주주명부 폐쇄 전에 미국 측이 지분을 받기 어려워진다. 반대의 경우엔 최윤범 회장이 시간을 벌고 대등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 다음 주 중 가처분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양측 모두 명분을 얻기 위한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다.

    고려아연은 과거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한 구조를 짰다. HMG글로벌이 외국 합작법인이냐를 두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고려아연도 JV에 직접 자금을 대기로 했다. 상법상 순환출자에 따른 의결권 제한을 피하고자 JV 출자 비율도 10% 미만으로 묶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3자 배정 증자의 당위성이다. 상법에서는 신기술 도입, 재무구조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이 있을 때만 이를 허용한다. 고려아연은 세계 최대 수요처에 직접 거점을 구축해 성장성을 확보한다는 논리를 짰다.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세부 내용을 따져보면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올해 들어 MP머티리얼즈, 리튬아메리카스 등 전략광물 기업에 직접 투자했다. 고려아연에도 이런 요청이 있었고 이에 JV에 직접 지분을 나눠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미국 로펌으로부터도 이런 전략적 흐름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정부 요인들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이번 거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회사는 온산 제련소 공동화 우려도 조기에 잠재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려아연이 경영권 분쟁은 공격보다 수성(守城)이 유리하다는 명제를 입증해 가는 모습이지만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역시 가처분 승리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초기부터 '아연 주권 포기' '주주 권리 침해' 등을 언급하며 고려아연의 행보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한국의 핵심 제조 역량을 미국에 퍼주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연합 측은 이번 증자 결정이 경영상 필요와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수차례 북미 시장 확대를 추진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고, 아연 조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미국에 진출할 시급성이 없고, 공장 신설 자금 역시 2027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과거 HMG글로벌 때도 긴급한 자금 조달의 필요성이 인정되진 않았다.

    이 프로젝트의 최초 기안자가 누구냐도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진칼 신주 발행 때는 제3자인 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제안한 반면 이번 사안은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시작됐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최윤범 회장이 거래 구조를 마련하는 데 깊이 관여했을수록 경영권 방어를 위한 것이란 인상이 짙어진다. 우리나라 산업 정책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사업인지, 미국 측이 향후 안정적으로 운영자금을 지원할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전망이다.

    최근엔 고려아연이 미국 정부제 제련소 지분을 취득할 권리(워런트)를 부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정부가 주당 1센트에 제련소 지분 14.5%를 인수할 수 있고, 제련소 가치가 150억달러가 되면 추가로 지분 20%를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 계약 정보임에도 공시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는 이사회에서 영풍 연합 측 인사들이 강하게 문제삼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회사는 반면 공시 사항이 아니며, 당장 지분을 대거 넘길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회사가 미국 투자가 불가한 논리를 많이 세웠지만 이번에 이를 뒤집었다"며 "우리 법원이 미국 정부 사정까지 봐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고려아연 측은 "오래전부터 미국에 사업장이 있었고 현지 자원순환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미국은 낯선 지역이 아니다"라며 "미국이 JV에 들어왔는데 미국 정부가 택한 기업은 가치가 오른다는 점을 입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