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범 한숨 돌린 고려아연 분쟁…다시 캐스팅보트 쥔 국민연금
입력 25.12.24 15:50
법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기각
최윤범 측 10% 우호 주주 확보
지분 경쟁 박빙…국민연금 주목
회사 국민연금 찾아 당위성 소명
韓美 국가 사업화하는 점은 변수
  • 법원이 고려아연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회사 측 손을 들어줌에 따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단숨에 지분 10%가량을 보유한 우호 주주를 맞게 됐다. 양 분쟁 당사자의 지분율 격차가 크게 좁혀진 가운데 주주총회 표대결의 키는 다시 국민연금이 쥐게 된 양상이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연관된 이번 분쟁에서 국민연금이 어느 편을 들게 될지 관심이 모인다.

    지난 15일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미국 테네시주에 제련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를 위해 회사와 미국 정부, 미국 기업 등이 참여하는 합작법인(JV)을 대상으로 약 20억달러 규모 증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은 지난 16일 법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중요 사안의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으며, 이번 증자는 최윤범 회장의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상법과 대법원 판례가 엄격히 금지하는 행위라는 점을 들었다. 자금 조달의 긴급성이 없으며, 거래 조건의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도 지적했다.

    24일 법원은 연합 측이 제기한 고려아연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핵심광물의 생산량을 증가할 경영상의 필요성 ▲미국 역시 핵심광물을 생산할 파트너가 필요 ▲미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경영 판단의 재량 범위 안이라고 판시했다. 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윤범 회장 측 11명 대 영풍 연합 4명 구도로 이뤄져 있다. 이 중 6명의 임기가 곧 만료되는데 연합 측 지분율이 높고 집중투표제도 도입됐기 때문에 4석이 연합 측에 돌아갈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연합 측이 자금력을 앞세워 지분율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 두 해 안에 이사회를 장악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번에 법원이 회사의 손을 들어 줌에 따라 경영권 분쟁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10% 이상의 지분을 가진 새 주주가 들어오면 영풍 연합 측 지분율은 희석돼 최윤범 회장 측 우호 주주 지분율과 엇비슷해진다. 지분 격차가 2%포인트 내로 좁혀짐에 따라 내년 주주총회 표대결도 박빙이 예상된다.

  • 얼마 남지 않은 연내에 양측의 지분율이 크게 달라지긴 어렵고, 이 외 거래 물량도 많지 않다. 이에 이번에도 5% 안팎의 지분을 보유한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의 판단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고려아연 분쟁에서 신중한 모습을 보여 왔다. 작년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철회했을 때는 회사에 불편함을 표했고, 이후 양측 사외이사에 절반씩 표를 던졌다. 연초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사수 제한 안건에 찬성하며 최 회장 측에 힘을 실어줬다. 회사가 추천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출신 인사는 사외이사 후보에서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주초 고려아연 측을 불러 이번 유상증자와 관련한 면담을 진행했다. 회사는 증자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적극 소명했는데 국민연금 측도 이를 상당 부분 수긍한 분위기로 알려졌다. 최근 증권사와 신용평가사가 증자 및 사업 확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법원도 이를 인정한 점이 국민연금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사다. 반면 MBK파트너스는 홈플러스 기업회생 절차 신청 후 국민연금과 껄끄러운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고려아연의 미국 제련소 프로젝트가 '국가 사업화'하는 점도 변수다. 회사는 한국과 미국 간 '경제 안보 협력'이라는 화두를 띄우며 주도권을 잡았다.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데 혈안인 우리 정부가 미국이 손을 내민 사업에 제동을 걸긴 부담스럽다. 최근 김성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자금 운용과 주주권 행사에 정부의 입김이 강화할 것이란 예상도 많아졌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까지 끼어들면서 경영권 분쟁의 분위기가 기우는 양상인데 국민연금이 어떤 판단을 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