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산업조정 대상은 배터리·철강?…석화 정리 안됐는데 선거도 변수
입력 26.02.12 07:00
이차전지 산업, 석유화학처럼 과잉설비 문제
판로 위축된 철강, 잠재 부실 큰 건설도 주목
수년째 주목받는 산업이지만 조정 쉽지 않아
기업 이해관계 조율 어려워…지방선거도 변수
  • 국내 증시가 새해 들어 고공행진하고 있지만 온기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일부 영역으로만 몰리는 양상이다. 실물 경제가 증시와 보폭을 맞추지 못하면서 건설, 철강, 이차전지 등 공급과잉과 잠재적 부실 문제를 안고 있는 일부 산업에 효율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당위성을 떠나 산업조정이 당장 시장의 화두가 될지는 의문이다. 각 산업의 상황이 다르고 개별 기업들의 이해관계도 첨예하게 엇갈려 조율이 어렵다. 석유화학 분야 조정 작업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치권도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 민심에 영향을 미칠 민감한 사안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아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내 주요 배터리 업계에선 몸집 줄이기가 분주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작년 말 미국 포드와 맺은 전기차 배터리 공급 계약을 해지했고, 이달 들어 스텔란티스와 설립한 배터리 합작법인(JV)을 단독 경영체제로 전환했다. SK온 역시 작년 말 미국 포드와 합작사인 블루오벌SK를 정리하며 대규모 손실을 인식했다.

    전기차 수요 부진(캐즘)이 장기화하고 중국과 경쟁이 격화하면서 주요 기업들이 생산 역량과 미래의 재무부담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을 꺼낸 모습이다. ESS(에너지저장장치) 등 새로운 먹거리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캐즘의 영향을 완화하기엔 부족하다. 석유화학처럼 '과잉 설비' 문제가 발목을 잡는 양상이다.

    지난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배터리 기업 임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배터리 업계에서도 석유화학과 같은 상황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다양한 해결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산업부는 배터리 기업 수를 줄이라는 취지가 아니라 밝혔는데, 시장에선 석유화학 다음은 배터리가 되는 것 아니냐며 주목하기도 했다.

    철강 업계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다. 석유화학, 이차전지와 마찬가지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의 공세에 애를 먹고 있다. 저가 철강이 국내로 유입되고 있지만 최대 수요처인 건설·부동산 부문의 경기는 부진하다. 주요 수출 시장인 미국과 EU의 관세장벽이 높아지는 것도 철강사들의 고민을 깊어지게 한다.

    중소형사들의 위기감은 더 크다. 수요 부진과 산업용 전기료 부담 때문에 전기로를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대형사와 달리 범용 제품에 집중하니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작년말 'K스틸법' 통과로 합법적으로 공급과잉을 해소할 근거는 마련됐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철강 산업의 조정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우후죽순 생겼다가 정리되는 것인지 의견이 나뉜다"면서도 "중소 철강사들의 부실 사례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 예의주시 중이다"라고 말했다.

    건설·부동산 분야 역시 부실화 위험이 큰 산업군이다. 2022년 유동성 호황기를 전후해 한창 벌였던 사업들의 브릿지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만기들이 올해 속속 돌아온다. 차일피일 만기를 늘려온 것들이 적지 않은데 굵직한 사고가 터지면 이전 '레고랜드 사태' 때처럼 파장이 일파만파로 퍼질 수 있다.

    사실 이런 산업들의 위기론이 제기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국가 산업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큰 틀에서 산업 지형을 바꿀 필요성도 있다. 반도체가 견인하는 증시가 앞으로도 견고하게 버티려면 이런 주요 산업들도 뒤를 받쳐줘야 한다. 이번 정부도 산업조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장 어떤 산업이 조정 국면에 들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현실적인 벽이 높다. 철강의 경우 석유화학과 가장 비슷한 공급과잉 형태지만, 석유화학 같은 개선 노력은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이 가장 큰 걸림돌인 만큼 국내에서 설비를 합치고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정부 기조는 선 자구노력, 후 정부지원이다. 매각 자산이 많거나 모회사 지원 여력이 충분한 기업들은 먼저 손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 뜻을 모으기 어렵다. 이차전지만 해도 빅3보다는 이에 소재를 공급하는 협력사들이 먼저 휘청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차전지 위험노출액이 많은 금융사들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가 기업과 은행의 팔을 비틀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다. 과도한 관여는 민간 기업의 재산권에 대한 제약으로 비칠 수 있다. 일부 규제 완화나 금융 지원 외에 정부의 카드도 많지 않다. 그나마 방향이 명쾌하고 수년 전부터 논의된 석유화학 산업조정조차 기업간 힘겨루기에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산업조정 움직임이 본격화하면 증시에 타격이 불가피하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올해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린다. 정부 입장에선 굳이 선거 전에 사업조정을 독려해 그간의 성과에 흠을 낼 이유가 없다. 정치권에서도 지원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기존의 사업장과 일자리를 줄일 사업조정에 대한 언급은 삼갈 것으로 보인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민간 기업들의 지배구조나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정부가 뒤에서 조정을 독려해도 의미있는 결실을 거두기 어렵다"며 "올해는 지방선거까지 있기 때문에 적어도 6월까지는 산업조정 논의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