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금융 RM의 종착역?…퇴직연금 전장서 다시 뛰는 베테랑들
입력 2026.07.16 07:00

취재노트

퇴직연금 501조원…법인 RM 수요 확대

KB, IB 출신 연금 배치로 네트워크 강화

연금 강화 추세 속 주목받는 퇴직연금 RM

"종착역 아닌 베테랑의 제2 영업전선"

  • (그래픽=윤수민 기자)

    증권사 기업금융 RM들 사이에서 퇴직연금은 묘한 위치에 있다. 회사채와 유상증자, 인수금융 딜을 뛰던 1선 RM들이 일정 연차를 넘긴 뒤 옮겨가는 자리라는 인식이 적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기업 네트워크를 살린 커리어 연장이고, 조금 삐딱하게 보면 전방에서 한발 물러난 후방 배치나 커리어 마무리를 위한 종착역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이 500조원을 넘어서면서다. 퇴직연금 RM은 더 이상 조용히 법인 계약을 관리하는 자리만은 아니다. 기업의 재무·인사 담당자를 만나고, 제도 전환을 설득하고, 임직원 설명회까지 챙겨야 하는 또 다른 영업 최전선이 됐다. "퇴직연금으로 가면 좀 편해지는 것 아니냐"는 말은 이제 절반만 맞는 농담에 가까워졌다.

    시장 규모가 먼저 바뀌었다. 지난해 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400조원을 넘어선 지 1년 만에 다시 500조원 선을 돌파했다.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이 전체 적립금의 54.3%를 차지했고, ETF 투자금액도 48조7000억원까지 늘었다. 퇴직연금이 단순 적립금 관리에서 투자상품과 컨설팅, 가입자 관리가 결합된 사업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연금 조직을 키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과거에는 퇴직연금이 은행과 보험사의 영역에 가까웠지만, DC·IRP와 ETF 운용이 커질수록 증권사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퇴직연금은 시스템과 상품만 있다고 되는 사업이 아니다. 법인 담당자와 관계를 만들고, 사업자 선정 PT를 뛰고, 제도 변경 때마다 회사와 임직원을 설득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기업금융 RM의 쓰임새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회사채와 유상증자, 인수금융을 담당해온 RM들은 이미 기업의 자금팀, 재무팀, 전략팀과 접점을 갖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 역시 결국 기업 내부 의사결정 구조를 뚫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네트워크는 곧바로 영업 자산이 된다.

    실제 증권사 현장에서는 기업금융 RM과 퇴직연금 부서가 함께 움직이는 일이 적지 않다. 퇴직연금 담당 부서가 제도와 상품, 운용관리 측면을 맡는다면 기업금융 RM은 기존 거래 기업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일부 하우스에서는 기업금융 RM의 핵심성과지표(KPI)에 퇴직연금 유치나 연계 영업 성과를 반영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채나 유상증자로 쌓은 법인 네트워크가 퇴직연금 영업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현장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KB증권 사례는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베테랑 실무자급 기업금융 RM이 퇴직연금 RM으로 옮겨가는 일은 증권가에서 낯선 장면은 아니지만, 임원급 IB 인력이 연금 조직으로 이동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KB증권이 최근 법인 연금영업 강화를 위해 IB 출신 임원을 연금그룹에 배치하자 업계에서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더 이상 후방 관리 업무가 아니라, 공기업과 대기업을 상대로 다시 한번 기업 네트워크를 겨뤄야 하는 영업 전장이 됐다는 방증이다.

    퇴직연금 RM의 업무 범위도 생각보다 넓다. 

    현재 진행중인 KB증권의 연금그룹 RM 채용공고만 봐도 공공기업과 대기업 등 법인 퇴직연금 마케팅, 신규 고객사 발굴, 기존 고객사 관리, 공공기관 사업자 선정 PT, 법인 대상 설명회, DB·DC·IRP 컨설팅 등이 주요 업무로 제시된다. 단순히 상품을 소개하는 수준이 아니라 법인영업과 컨설팅, 프레젠테이션, 사후관리가 모두 붙는 구조다.

    퇴직연금 영업이 기업금융보다 쉬운 자리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회사채 딜은 발행이 끝나면 일단 한 사이클이 마무리된다. 유상증자나 인수금융도 거래가 종결되면 다음 딜로 넘어간다. 반면 퇴직연금은 계약 이후가 더 길다. 기업 담당자를 계속 만나야 하고, 임직원 설명회를 열어야 하며, 수익률과 상품 라인업, 민원까지 신경 써야 한다. 한 번 따내고 끝나는 영업이 아니라 계속 붙잡아야 하는 영업에 가깝다.

    결국 퇴직연금 RM은 기업금융 RM의 '종착역'이라기보다 '제2 영업전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베테랑이 필요한 이유도 분명해졌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기업의 장기 파트너로 들어가야 한다. 단기 딜을 많이 해본 사람보다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를 알고, 담당자와 오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때가 많다. 젊은 RM의 체력과 속도도 필요하지만, 오래 쌓은 법인 네트워크와 눈치가 먹히는 시장이기도 하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RM을 두고 예전에는 기업금융 RM의 종착역처럼 말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며 "법인 네트워크가 있는 베테랑 RM들이 다시 필요한 시장이 됐고, 실제 영업 강도도 회사채나 유상증자 커버리지보다 약하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퇴직연금은 더 이상 조용한 후방이 아니다. 500조원 시장을 두고 은행과 보험, 증권사가 다시 붙는 전장이 됐다. 한때 회사채와 유상증자 현장을 누비던 기업금융 베테랑들도 이 전장에서 다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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