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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분산 기업, 즉 뚜렷한 주인이 없는 기업들엔 정권교체기에 예외없이 외풍(外風)이 불었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정책자금을 앞세운 정치권의 입김으로 인해 최고경영자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게 수순처럼 여겨져왔다.
새정부 출범 첫 날인 4일 강구영 한국항공우주(KAI) 대표이사 사장은 대주주인 한국 수출입은행(지분율 26.4%)에 사의를 표명했다. 강 사장의 임기는 오는 9월까지였으나 연임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공군 중장 출신인 강 사장은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의 후보시절 캠프에 몸담았던 인물 중 하나다.
KAI의 대표이사는 관료 또는 무관(武官)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KAI는 정권 이양 때마다 대표이사도 교체되는 모습을 반복해왔는데 항공산업과 무관한 육군 출신 인사가 대표이사로 선임된 사례도 있었다.
제 1대 사장은 교통부 장관을 지낸 임인택 사장, 2대 길형보(육군참모총장), 3대 정해주(통상산업부 장관), 4대 김홍경(산업자원부 차관보), 6대 김조원(감사원 사무총장), 7대 안현호(지식경제부 차관) 그리고 2022년 취임해 최근 사의를 표명한 강구영 사장은 공군참모차장 출신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첫 날, 강 사장의 사의 표명은 사실상 새정부 인사에 자리를 물려주겠단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포스코그룹 역시 정권 교체와 함께 회장직 교체가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유상부(5대), 이구택(6대), 정준양(7대), 권오준(8대) 전 회장들은 정권 교체기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역대 회장들 가운데 연임해 임기를 마친 인사는 최정우 전 회장이 유일했다.
최 전 회장도 3연임을 앞두고 국민연금이 회장 선임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CEO 후보군에서 제외됐고, 결국 연임에 실패하며 물러나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회장이 교체했던 전례를 비쳐볼 때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포스코그룹 회장으로 선임된 장인화 회장 역시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다.
포스코그룹의 회장 교체는 낙하산 인사 또는 관치(官治) 논란을 넘어 그룹의 근간을 흔드는 사례로 기록돼 왔다. 회장의 교체와 맞물려 그룹의 기조와 사업의 방향성 180도 바뀌는 모습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이구택 전 회장은 '글로벌 철강기업'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명박 정부에서 선임된 정준영 전 회장은 '해외자원개발'과 '해외광산' 인수에 그룹의 역량을 집중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수장을 맡은 권오준 전 회장은 다시 '철강 본업을 강화'하겠다며 비핵심사업의 구조조정에 나섰고, 문재인 정부에서 선임된 최정우 전 회장은 '비철강 부문'의 확대를 주장하며 기조를 뒤엎었다.
사실 포스코그룹엔 현안이 산적해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으로 수입하는 철강 제품의 관세를 50%로 대폭 상향조정하면서 포스코를 비롯한 국내 철강업계는 전례없는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여기에 최고경영진 인선에 대한 논란까지 가중되면서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는 평가도 나온다.
관치(官治) 논란이 끊이질 않는 기업들 중엔 KT도 빠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권 교체기에 수장이 교체되는 흐름을 반복해 왔다.
2002년 KT가 민영화 이후 초대 대표였던 이용경 전 회장은 단임으로 임기를 마쳤지만 뒤이은 남중수(2005~2008년), 이석채(2009~2013년) 전 회장 등은 모두 뒤끝이 좋지 않았다.
민영화 이후 첫 연임에 성공한 남중수 전 회장은 임기 중반 납품비리 의혹·뇌물죄로 구속 수감돼 물러났다. 이석채 전 회장도 연임에 성공했으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배임 의혹과 위성 헐값 매각 논란 등이 거론되며 검찰의 압수수색 끝에 결국 사퇴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KT 수장에 오른 황창규(2014~2020년) 전 회장은 연임 임기를 마친 유일한 CEO로 기록됐다.
황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구현모(2020~2023년) 전 대표이사 사장은 회장직을 없앴다. 구 사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였던 지난 2022년 한 차례 연임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지난 2022년 말 KT는 구현모 전 대표이사를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선출했다. 구 전 대표의 후보선출 당일날, 취임 이틀째를 맞은 국민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공개적으로 KT 대표이사 후보 선출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자 KT는 구 전 대표의 단독 후보 추대를 철회하고 CEO 공개모집 절차에 돌입했는데 이마저도 국회의원들의 문제 제기에 가로막혔다. 결국 KT는 10개월가량 CEO 공백기가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어야 했다. 현재는 2023년 8월 취임한 김영섭 대표이사가 KT를 이끌고 있다. 김 대표이사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주인없는 회사인 KT&G와 한국산업은행이 대주주인 HMM 등도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기업으로 꼽힌다. 1989년 민영화에 성공한 KT&G는 외부 사장을 선임한 전례는 없지만, 지난해 소유분산 기업을 대상으로 정부가 구조개혁을 추진하던 와중에 최장수 CEO인 백복인 전 사장이 스스로 연임을 포기한 사례가 있다.
HMM은 올해 초 최원혁 전 LX판토스 대표이사를 신임 사장으로 선임했다. 최 사장의 임기에 대해 아직은 논하기 이르다. 다만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부산 이전'과 HMM의 민영화란 중대한 과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현 정권과 얼마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첫 날, KAI 대표이사 사의
정권 교체기, 회장 낙마에 사업기조 180도 바꾼 포스코
KT 대표 선임 과정엔 국민연금이 노골적으로 개입
민영화 3형제 KT&G, 李 핵심공약 HMM도 사정권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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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06월 04일 15:09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