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장 한마디에…금융지주,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 도입 '시험대' 되나
입력 25.12.15 07:00
취재노트
이찬진 금감원장, 국민연금 주주추천 이슈 '점화'
사외이사 추천하려면 '경영참여' 변경해야 할수도
경영참여 사례 '한진칼' 유일…"원칙·기준 불명확"
'투명성' 명분 앞세우다 금융지주 '태풍의 눈' 될라
  • 금융감독원장이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 논란을 다시 꺼내들면서 금융권에서는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을 통한 정부의 금융지주 지배력 강화 논란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배구조 개선 태스크포스(TF) 출범 전이지만, 풀어야 할 쟁점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금융지주 CEO 간담회에서 금융지주 사외이사 추천경로를 다양화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특히 '국민이 추천한 기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도 거론됐다. 금융지주 이사회에 대한 정부 영향력이 강화할 수 있다는 관치(官治)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드는 배경이다.

    이 원장은 과거에도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주장했다. 특히 2021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사모펀드 소비자 피해를 이유로 KB·신한·하나·우리금융을 ESG 문제기업으로 언급, 국민연금이 사외이사 후보 추천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업계에서는 신중론이 더 크다. 공적연기금이 특정 금융지주 이사회 구성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은 그동안 금융권에 반복돼온 '관치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금감원 측은 아직까지 여러 아이디어 중 하나로 논의되고 있는 단계란 설명이지만, 금감원장이 과거 주장했던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추진 가능성이 높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앞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도입에도 실제 경영권 행사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왔다. 국민연금이 경영권을 행사하려면 투자보유 목적을 단순투자, 일반투자, 경영참여 중 '경영참여'로 공시해야 하는데, 이 중 경영참여 목적으로 공시한 사례는 2019년 한진칼이 유일했다. 이마저도 이후 단순투자로 되돌렸다. 

    4대 금융지주 중에서도 국민연금이 경영참여로 공시한 곳은 없다. KB금융만이 일반투자로 분류돼 있을 뿐, 신한·하나·우리금융은 모두 단순투자 상태다. 업계는 국민연금이 금융지주에 사외이사를 추천하기 위해서는 투자보유 목적을 일반투자가 아닌 '경영참여'로까지 변경해야 할 가능성도 다수 거론된다.

    국민연금은 투자 목적을 '경영참여'로 명시하지 않은 경우에도 일정 수준의 주주활동이 가능하다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주주제안의 형태로 이사 후보를 직접 추천할 경우, 그 성격에 따라 사실상 경영참여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는 게 국민연금 내부 기준이다. 반면 일반 주주가 이사 후보를 제안하는 절차를 따를 경우에는 투자 목적이 '일반투자'이더라도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문제는 금융당국이 어떤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이 '점진적인 관여'를 원칙으로 삼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융지주를 상대로 한 사외이사 추천은 기존 관행을 넘어서는 조치로 비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최근 국민연금의 역할 확대에 무게를 두고 있는 현 정부 기조를 고려하더라도, 금융지주에 대한 직접적인 이사회 개입은 시장에 다소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의 보유 목적이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만 바뀌어도 주주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일반투자만으로도 경영진 면담, 공개서한 발송, 주주제안 등 상당한 수준의 주주활동 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3분기 말 기준 국민연금이 5% 이상 보유했다고 공시한 120개 상장사 중 '일반투자'로 분류된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경영참여' 목적을 선택할 경우 금융지주와 국민연금 모두 부담이 커진다. 금융지주로서는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를 통해 금융당국의 영향력이 경영 전반 및 CEO 선임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 역시 경영참여 목적이 되면 5%룰 공시 의무 강화, 주주제안 책임 확대 등 법·제도적 부담이 크게 늘어나 기금 운용의 제약이 불가피하다. 그동안 국민연금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온 이유 중 하나다.

    금감원은 금융지주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추천 논의 배경을 투명한 승계구조와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논의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역할과 권한 정립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융지주가 돌연 한진칼 이후 '첫 번째' 케이스가 되는 것이 적절하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국민연금의 경영참여에 대한 원칙과 한계가 먼저 정립돼야 관치 우려도 해소될 수 있다. 충분한 제도적 논의 없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금융권 전반의 지배구조를 둘러싼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잡음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